나는 배치됐다-2

지켜야 할 건 자존심만이 아니라서

by 암시랑


대학 졸업하고 27년을 노동 현장에 몸담았어도 취업 전에 인수인계 말고 사전 미팅이란 걸 해 본 적이 없어서 얼마간 당황했다. 그렇게 사전미팅 당일, ○○협회를 찾았다.


점심시간이 끼어 있긴 했지만 담당자는 약속 시간보다 늦게 나타났다. 앳된 여직원은 나를 흘깃 지나치며 “장애인 일자리?”라며 혼잣말인지 질문인지 모를 말끝을 흐리며 칫솔을 들고 사라졌다. 시청에서도 그러더니 도대체 이런 무례함은 다들 어디서 배우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가 공적 영역에선 여전히, 요즘 말로 참 이븐하다. 왜 도통 나아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차별과 무시, 한 자락 깔고 보는 시선에 적잖이 불쾌했다. 하지만 어쩌랴, 자본주의 논리를 배우며 자란 탓에 아쉬운 놈이 약자가 되는 세상을 꿰뚫고 있으니 또 참을 수밖에.


물론 괜히 피해의식에 쩐다며 타박할 사람도 있겠지만, 장애인 복지관에서 오랫동안 서비스 제공자의 역할을 하다가 수혜자의 입장이 되고 보니 이제야 눈에 띄는 것일 수도 있다. 분명한 건 피해의식은 확실히 아니다.


일자리 혹은 취업에서 장애인이건 아니건 개개인의 역량을 알아야 뭐라도 시키지 않겠나. 한데 이곳에선 역량이 상관없는 걸 보면 딱히 시킬 일이 없어서 파악할 필요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저 장애인 취업률 숫자 늘리기 그 이상 그 이하가 아닐지도.


물론 이마저도 간절하게 필요한 사람이 있을 것이며, 내가 배부른 소릴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노동‘력’에서 보자면, 회사는 자아실현의 장소는 아니더라도 '일'을 통해 성취감을 느낄 수 있음을 전제로 하면 당연히 개개인의 업무 능력은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 하여 이 당연한 것이 필요 없다는 듯 무시되는 일자리 사업이 나는 꽤나 황당했다.


어쨌거나 칫솔을 들고 돌아온 앳된 여직원이 궁금한 것을 물어보라니 물었다. 출퇴근 시간, 점심시간 그리고 맡게 될 업무에 대해. 하지만 담당자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뭘 할 줄 알긴 알아요?라는 눈빛과 동시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당황했고 혹시 내 이력서를 보았는지, 내 경력에 맞는 일을 하는 게 아닌지를 재차 묻는 내게 담당자는 당황스럽다는 듯 동그랗게 커진 눈을 하고 대답했다.


"네? 저희는 ○○님 경력을 알지 못해요. 시청에서 이름과 연락처, 주소 정도만 간단히 알려주고 이곳으로 배치했고 우리는 그냥 받은 거예요."


살짝 한 옥타브 올린 목소리의 담당자는 뭔가 억울하다는 표정이었음에도 정작 나는 순간 짐짝이 된 것 같았다. 쓸모도 없는데 시청에서 주니까 어쩔 수 없다는 받았다는 이런 상황이 자존심 상했달까. 그리고 담당자는 솔직히 ○○님 경력을 알았다 한들 여긴 별로 일이 없어서 따로 드릴 것도 없긴 해요라며 한숨을 쉬었다.


내게 부여된 업무는 강의실 뒷정리다. 청소하는 거냐고 까놓고 물었더니 또 그건 아니란다. 청소는 참여형 일자리분들이 할 거라서 청소는 아니라고 손사래 친다. 강의실 의자 정리 정도로 생각하라면서 개인적으로 공부를 하던 독서를 해도 된다고 편하게 생각하라고 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은퇴 비슷한 퇴사당한 김에 몸 좀 추스르면서 쉬엄쉬엄 일해야겠다고 했는데 뜻밖에 아예 놀게 생겼다. 취업이 아니니 경력은 단절되게 생겼고, 편하게 생각하기는커녕 마음고생 오지게 하게 생겼다.


그냥 다 포기하고 다시 구직활동을 해야 하나, 괜히 실업급여만 날아가게 생긴 건 아닌가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친구말대로 다 늙어서 놀면서 따박따박 월급 나오면 그게 땡잡은 거 아니냐는데 이참에 불로소득을 누리는 속물 한번 돼 볼까 싶기도 하고. 아, 조급한 마음에 덜컥 결정한 일자리가 정신을 사납게 만들었다.


불면증이 심한 탓에 첫날부터 지각이라도 할까 봐 수면제를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더니 좀 이른 시간에 잠이 깼다. 사회복지사였던 몇 달 전보다 1시간이나 늦은 시간이었지만 여유로웠다. 장애인 콜택시를 예약하고 준비를 막 시작하려는데 2분 만에 배차가 되었다는 메시가 왔다. 평소라면 1시간 이상 지체되는 배차였는데, 오늘은 첫날이니 50분 정도는 미리 가주는 게 예의지!


9시 55초, 그러니까 9시 1분이 되기 전에 담당자는 활기차게 동그란 얼굴을 내밀었다. 그래 난 오늘 뭘 하면 될까요?라고 묻는 내게 담당자는 출근부에 사인하시고 편하게 계시다 시간 되면 가시면 돼요. 굳이 저한테 말 안 하고 가셔도 되고요라고 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요, 아직 자립하지 못한 아이들이 있는 처지라 지켜야 할게 자존심만 있는 게 아니라지만, 경력과 꿀보직을 맞바꾼 게 잘한 일일까 종일 혼란스럽다.


이런 나와는 다르게 엄마는 엄마대로 걱정을 많이 하셨나 보다. 재취업이 잘 안 돼서 코빠트리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면서도 가뜩이나 나이도 많은 데다 자존심 세고 매사 오기 작렬하는 더러운 성질에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할까 전전긍긍해하셨다.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을 다녀오는 길, 룸미러로 보이는 엄마는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왜? 엄마, 할 말 있어요? 무슨 눈치를 그렇게 본데?”

“아니, 출근은 했다는데… 일을 많이 시키는 건 아닌가 해서. 나이 많다고 무시당하진 않나 싶기도 하고….”


망설였다.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지, 그냥 좋다고 둘러대야 하는지. 나는 더 이상 사회복지사가 아니라고 하면 많이 아쉬워하실 게 뻔해서. 엄마는 몸 불편한 아들이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걸 자랑스러워하셨다.


“일이 힘들진 않아? 사람들이 잘해주고?”

“괜찮아요. 그냥 책 보면서 놀아요.”

“무슨 그런 일이 있데? 놀아도 돈을 준다니?”

“네. 그러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래. 너무 열심히 하려고 애쓰지 말고.”

“할 일도 없고 편해요. 여기선 사회복지사가 아니에요.”

“그래? 그럼 뭐데?”


그러게, 난 도대체 여기선 뭐 하는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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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