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다행에 비친 노동의 가치
재취업은 안 되고 할 일이라곤 TV 보는 게 하루 일과가 됐다. 그날, MBC 예능 <푹쉬면 다행이야(푹다행)>을 보다가 시퍼렇고 큼지막한 글씨가 화면을 가득 채운 걸 보고 뜨악했다. 엉겁결에 한 퇴사가 은퇴처럼 돼버려서 나름 제풀에 눈칫밥을 말아먹고 있는 터라 그걸 보고, '아 놔 이제 밥수저 놔야 하나?' 싶었다.
부부도 등 돌리면 남이라는 세상에 직장 동료가 애틋할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종종 메신저의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안부를 물어오는 동료들이 있다. 뜻밖에 위로도 받지만 속도 모르고 염장을 지를 땐 빡이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이건 안부니 위로다. "꿈에 그리던 책방은 언제 해요?"라거나 "바닷가로 이사 준비는 잘 돼요? 부럽다." 이건 요즘 금리나 주택 시장, 따박따박 돈 나올 구멍도 없는 상황에 턱도 없는 일이라서 분명 염장 지르기다. 심지어 부럽다고 하면 토할 때까지 멱살을 쥐고 흔들고 싶어진다.
아무튼 상시적인 월급쟁이 신분을 취득하지 못하면서 노동의 가치를 ‘밥’이라고 부르짖는 예능에 크게 자극받았다. 그냥 허허 백수 놀리냐, 고 아량 넓게 넘겨도 될 일일지 모르나 잊고 있던 K가 생각나니 속이 시끄러워졌다.
오래전, 그놈의 밥벌이를 하지 않는다고 타박하며 K에게 제대로 상처 줬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놀만하니 놀았던 것인데 논다고 그렇게 몰아붙였나 싶다. 노동의 신성함은 개뿔, 그땐 뭘 몰라도 한참 몰랐다. 레닌도 장애인은 노동에서 자유롭다고 했는데 왜 우리는 제 밥벌이를 안 하면 쓸모없는 인간 취급을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덩달아 K에게 그랬다.
장애인 복지 현장에 12년 동안 머물면서 봐온 장애인은 보통 빈곤하고 사회보장제도 영역에 존재한다. 모두는 아니지만 대다수가 그렇다. K도 그랬다.(K의 이야기는 천천히 하기로 하고)
특히 장애인을 일도 하지 않고 세금만 축내는 인간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은 보통 분노에 가까운 삿대질을 퍼붓는다. 무능력하거나 게을러서 그렇다고 막말을 해대면서. 하지만 일하고 싶은 장애인이 정말 없을까? 기회가 없는 건 아니고?
서두가 좀 길어졌다. 카메라가 부엌 쪽을 비추면 보이는 문구는 마치 노동을 하지 않으면 생살여탈 하겠다는 협박을 하는 것 같아 뜨끔하다. 일 하지 않는다고 '쓸모없는 인간', '왜 사냐', '밥버러지' 같은 말로 노동이 인간의 가치를 가르는 척도처럼 느껴져 세상 각박하달까.
아무튼 내가 요즘 놀고 있어서 민감한 건지 모르겠지만 일하지 않는다고 인간성이나 존엄을 타인에게 의심받거나 훼손되는 건 너무 가혹하다.
그런 의미로 장애인이든 아니든 노동은 개인 상황에 따라 하고 싶고 할 수 있으면 하고, 하고 싶지 않고 할 수 없으면 하지 않아도 밥은 굶지 않는 세상이면 좋겠다. 그럴 필요가 없으면 더 좋겠지만 필요하다면 누구나 사회보장제도에 기대도 부끄럽거나 손가락질하지 않는 세상이면 좋겠다. 사회보장제도는 권리이므로, 그 당연한 것을 몰랐다.
무슨 예능 프로그램 하나에 개풀 뜯어먹는 소리고, 쓸데없이 확대해석 하는 거 아니냐 하겠지만 오래전, 불편해 보이지 않은 모습으로 놀고먹던 K에게 모질게 대했던 이야기를 이어 본다. <푹다행>을 폄훼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으니 오해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