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례함을 용서해 줄래?
자, 이제 K의 이야기를 해보자.
사회복지를 하기 전, 나는 눈앞에는 푸른 바다가 넘실대고 등뒤로는 한라산이 우뚝 솟은 제주에 살았다. 직업훈련기관 디자인 강사로 그곳에서 처음 K를 만났다. K는 30대 중반의 건장하고 잘 생긴, 하지만 생각보다 좀 더 불성실한 수강생으로 유명했다. 학원들을 백화점 쇼핑하듯 돌아다닌다고.(뭐, 20년이 훌쩍 넘은 이야기라서 그땐 그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K는 누가 봐도 매력이 차고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하루 일과는 딱히 하릴없어서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는 데다 사람들이 가만 놔두지 않고 불러내 술도 퍼 먹이는 소위말하는 인싸 중의 인싸였다.
서울에서 제주도로 이민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서울에서 선생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왔다”라며 호감 가는 외모에 유머러스함까지 갖춘 K가 나타났다. 수강 등록을 하고 한참 너스레를 떨다 돌아갔다. 그날은 K 덕분에 하루종일 유쾌했다.
다음 날부터 결석이 이어졌다. 첫날은 걱정했고, 둘째 날은 무슨 큰 사고라도 난 게 아닌가 안절부절못했다. 수강 카드에 연락처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원장에게 알렸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원래 그런 사람'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신경 끄란 소리도 덧붙였다.
하나라도 배우겠다는 수강생의 결석을 '원래 그런' 사람으로 치부하기에는 인간애라고는 코딱지만큼 밖에 없는 나로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른 수강생들에게 물었더니 뜻밖에 원장과 비슷한 반응이다. '좀 그래요'라던가 '심심하면 나올 거예요 ‘라는 식이었다. K는 2주 만에 진한 술냄새를 풍기며 나타났다.
K는 무료국비지원으로 3일 이상 무단결석하면 퇴학이다. 나도 알고 K도 알았다. 물론 원장도 당연하다. 그런데도 K는 퇴학은커녕 그동안 과목을 바꿔가며 무료 수강을 해왔다. 취업은 1도 관심 없는데 직업훈련을 수년 째 받고 있다니 좀 당황했는데 ‘별신경 안 써도 되니 좋지 않냐’라며 원장은 그냥 내버려 두라고 했다.
보기에 몸도 짱짱한 남자가 왜 무료 국비지원을 받는지 상당히 이상하고 궁금했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지체장애, 산업재해 수급’인 수강 카드 기록은 K 정체를 더 궁금하게 만들었다.
K가 먼저 하지 않는 이상 개인적인 이야기를 시시콜콜 물을 수 없으니 그냥 못마땅해하기로 했다. 놀고먹는 K는 진짜 무료해지면 학원에 나타났고 대부분 데스크 여직원과 수다를 떨다가 그냥 갔다. 내가 짜증이 아우라처럼 뿜어 나올라치면 그때서야 슬그머니 교실로 들어왔다.
또 K는 종종 인근 복지관에서 뭔가 받아올 때는 우리나라 복지가 좋아졌느니 뭐니 하면서 흰소리를 했다. 그런 K가 삿되 보여 얼마간 한심한 감정이 들었는데, 돌이켜 보면 '나도 이렇게 열심히 살잖아'라는 식의 잘난 체를 했던 건 아니었을까 싶다. 어쨌든 싫은 티를 내고는 했다.
술냄새를 폴폴 풍기며 나타난 또 다른 어느 날, K는 복지관에서 받았다며 큼지막한 빵 보따리를 책상에 풀어놓으며 같이 먹자고 웃었다. 하지만 나는 웃지 못하고 꾹꾹 눌러왔던 말을 격양되게 뱉었다.
K가 놀랐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래 보였다. 순간 정전된 듯 눈동자가 흐릿해졌으니까.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 호감을 가졌던 강사가 질책하듯 거친 말을 해댔으니 그럴 만도 했을 테다. 잠시 멀뚱했던 K는 늘 그랬던 것처럼 이내 비실 웃으며 말없이 일어서 터덕터덕 학원을 나갔다. 그땐 이 말이 얼마나 무례한 말이었는지 몰랐다.
그 후 K는 학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터덕터덕 나가는 모습이 눈에 밟혔지만 취업도 배움에 대한 의지도 간절하지 않은 K를 굳이 찾진 않았다. 대신 원장은 지원금 끊기게 생겼다고 울그락 푸르락 했다. 섬 어디에도 K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이후 이야기는 길어서 다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