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의미심장한 제목에 끌렸다. 할머니와 할매의 경계가 뭘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친할머니는 할머니고 외할머니는 할매라 부르던 아들에게 물어볼까 싶다가 참았다. 물어봤자 적절한 의미는 아닐듯해서.
'할매와 손자가 공통으로 가지는 '적'이 누구일까?'라는 궁금증으로 시작한 이 소설은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시험이란 시험에서 88연패의 기적을 보여주는 주인공 동석의 우울함 내지는 무료함(읽다 보니 비굴함도 조금)과 67년 만에 나타난 갈치만큼이나 고운 은빛의 머리칼을 가진, 게다가 염병에 걸려 죽었다 부활한 할머니의 담담함이 어울린 극적인 상봉이 처음에는 그다지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근데 그 기분은 딱 40페이지까지였다. 갑자기 그것도 67년 만에 등장한 은갈치 색 머리의 할머니보다도 더 놀라운 60억, 세금 빼고도 40억의 등장에 가족들의 극적인 입장 변화에 빵 터졌다. 당신이라며 저주를 퍼붓다 바로 무릎 꿇고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하고 산 세월을 눈물로 읍소하는 달자의 모습에 웃지 않을 수 있을까.
67년 만에 부활한 엄마를 피해 이틀이나 외박을 할 정도로 소심한 아들을 나타나게 만들고 넉넉한 덩치만큼이나 풍부한 포용력을 숨긴 며느리를 갑자기 뽐뿌질 하게 만들며, 독립군 후손의 면모를 지닌 그래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소신을 버릴 수 없을 것 같은 자세의 딸을 단박에 무릎 꿇게 만드는 할머니의 한방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주먹 사이사이로 갈치 빛의 머리칼을 움켜쥔 짝불이의 배신감과 상실감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게 더 웃음이 났다. 미안하게도.
"어머니는, 돈에 관련된 유사시엔 냉정해지고 교활해지고 담대해지고 뻔뻔해지는 어머니는 할아버지 절규에 대꾸하는 대신 할머니에게 말을 붙였다."라는 절절하게 가슴을 후벼파는 이 문장 뒤를 바짝 쫓아 튀어나오는 며느리 대사는 감탄을 자아낸다. 그래서 웃프다.
"시원한 주스 드릴까요?"
또 딱 여기까지다. 62페이지. 웃다가 목에 탁 걸리는 묵직한 감정 덩어리가 만져진다.
아, 뭐지? 이 소설?
잡년이, 그것도 해방을 맞아 염병에 걸려 죽었다던 아주 개잡년이 부활해서 벌어지는 일들이 다름 아닌 개잡놈들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이다. 그래서 쫄려서 어쭙잖게 시작도 못한 독립투사는 냄새만 맡은 짝불이나 되지도 못할 뜬구름을 부여잡고 유세나 떠는 짝불이 아들이나 그놈이 그놈인데 여기다 조선 놈, 일본놈, 미국놈 어떤 놈이든 간에 "지가 쫄리면 마누라부터 팬다"라는 끝순이 할매의 초연함에 눈물이 났다.
어쩌면 35년 생 김지영이 부활한 건지도 몰라 더 서글프게 마음을 후벼판다.
"긴장을 하면, 위험이 닥치면, 남자는 폭력을 생각하고 여자는 비상을 생각한다." p314
왜 현애는 버티는 것인지가 궁금하다기 보다 왜 동석에게 진 마음에 빛을 애먼 상우의 주먹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맷집을 키우는 것으로 갚으려 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시종일관 웃다 울다하게 된다. 아마 똥구멍에 꽤많은 털이 자랐을지 모를 일이다. 예의 깃털 달린 기괴한 밤색 벙거지 모자를 쓰고 동전만 한 은빛 반짝이가 잔뜩 달린 원피스를 입은 할매를 통해 세대를 관통하는 여성들의 잔혹사를 쫙 펼쳐진 파노라마를 본 듯하여 무겁고 아프면서도 너무 재밌어 미안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