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기억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mugae일공오 Jun 03. 2021

기억 2

그는 내가 불편했다. 운명 같은 우연한 마주침이 그도 신기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날, 그가 택했던 그 길은 인적이 드물고 평소라면 가지 않는 길이었다. 약속에 늦어 그 길을 택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그가 지하철역에 가는 중이었다는 것을 듣고 그곳까지만 동행하기로 했다. 그는 나와 같이 걷는 순간을 벗어나려는 듯, 조금 빠르게 걸었다. 나는 그와 발걸음에 맞추기 위해 평소보다 더 빠르게 걸었다.


 지하철역까지는 5분 남짓 걸렸다. 그와 헤어지기 너무 아쉬웠지만 그의 약속 장소까지 따라갈 만큼 스토커는 아니었다. 마음은 가지 말라며 붙잡고 싶었지만, 나에게도 나만의 존엄성이 있다며 스스로를 말렸다. 나는 다시 바다로 돌아왔다. 혼자 맥주를 마셨다. 그와의 기억을 바다에 묻어버리고 싶었다. 평소 마시지 않는 술을 마시니 취기가 좀 더 빨리 돌았다. 바다를 계속 보다가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등대가 있는 외떨어진 길을 발견하였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평소에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따라 불렀다. 그냥 이렇게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게 도움이 될 것만 같았다. 가만히 있기엔 심장이 너무 두근거렸다.


새벽 4시쯤, 그에게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저 넘실넘실에 있어요'

몇 번의 메시지 끝에 그가 온다고 했다. 그도 아마 떠올렸을 것이다. 아마 오늘을 끝으로 우린 다시 볼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그가 도착하기 전, 아이스크림 두 개와 양말을 새로 샀다. 도착한 그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고는 바다에 발을 담그자고 제안했다. 늦가을이라 날이 제법 쌀쌀했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바다에 발을 담갔다. 주변은 저 멀리서 반짝이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별빛 같은 불들이 다였다. 처음, 그와 만났을 때 그 불빛들을 보고 내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뭔가 저 불빛들이 있는 바다를 보면 아포칼립스 같아요. 저 멀리 알 수 없는 미지의 생명체들이 이 육지로 침공하러 오는 것 같아요. 무섭지 않아요?'

그는 나를 보며 웃었었다. 그가 내 생각에 동의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가 같이 나누고 있는 그 순간을 그도 사랑하고 있다고 난 생각했다.


'집 가시는 지하철역까지만 데려다 드릴게요. 아마 첫 차 타고 가실 수 있을 거예요. 저는 택시 타고 갈 거라 아무 길로 가도 상관이 없어요.'

그와 함께 지하철역까지 걸어갔다. 평소처럼 장난치며 투닥거리기도 하고 크게 웃기도 했다.  마치 우리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이런 일상적인 행복이 좋은 것일 뿐인데, 왜 그는 자꾸 이런저런 이유를 들먹이며 나를 밀어내는 걸까? 왜 이런 좋은 감정들을 억지로 버리려 하는 건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난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지하철역까지는 꽤 먼 거리였지만, 너무도 빨리 도착해버렸다. 나는 머뭇거렸다. 이대로 그를 보내면, 도대체 우린 다시 볼 수 있긴 한 걸까? 그런 일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저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제 숙소인데.. 조금만 더 걷다가 가면 안 돼요? 조금만 걷다가 택시 탈게요'

그가 망설이는 기색이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하지만 금방,

'그냥 숙소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우리는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기 위해 뒤돌았다.

그때, 우리 눈앞에 비춘 것은 떠오르고 있는 해였다. 하늘은 여러 겹으로 나뉘었다가 합쳐지며 수십 가지의 페인트를 쏟아놓은 것 같았다. 그도 같은 느낌을 받고 있다는 것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평소에는 아무 감정이 없는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어떤 것을 사랑할 때의 눈빛을 나는 알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억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