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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빗소리 May 21. 2024

깨진 소주병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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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소주병을 바라보며



 누가 너에게 다녀갔다는 것이다

 누군가 너에게 왔다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누군가 너의 모든 것을 단 한 방울도 남김없이

 가져가 버렸다는 것이다

 주둥이가 깨져 가느다란 목이 사라진 병

 누군가 너의 길고 아름다운 휘파람을 앗아가서

 네가 네 취한 혈류를 모두 마셔버렸다는 것이다

 텅 빈 스스로를 결코 참을 수 없어

 공중을 향해 자신의 목을 수탉처럼 바쳤다는 것이다

 비어버린 생을 용납하기 괴로워

 허공의 무한한 길이 열린 창틀에

 목을 매달아 놓았다는 것이다

 내 안의 누군가, 네 안의 누군가

 너를 비틀어 처형했다는 것이다

 소주 따위야 병신 취급하며 목을 따 버리고

 효수의 나머지를 바닥에 던져 버렸다는 것이다

 자신을 산산조각 냈다는 뜻이다

 산산이 부숴 버리려 했으나

 미련 많던 긴 목과 복잡한 머리만 박살 낸 채

 텅 빈 몸뚱이만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모든 걸 비우려 했지만

 날카로운 한이 되었다는 것이다

 금방 무너져 내릴 금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채울 수도 없는 삶이여

 이제 영영 나를 버린다는 것이다

 곧 사금파리가 되어 조각조각 바닥의 반짝임이 된다는 것이다

 지상에 잘게 부서져 가장 낮게 두근거리는

 별빛, 가장 먼 우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한 때 한 사람의 가슴을

 그의 청춘을 뜨겁게

 데웠다는 것이다




* 빈 병을 바라보았다, 금이 간 채 버려져 있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한때 우리 모두 텅 빈 병이 되어, 누군가 다녀갔다는 청춘의 시간을 온몸으로 증거하던 시절. 그런 은유가 도처에 가득했던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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