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손과 하이파이브! 벽 하나를 두고 세상에 다가서기
* 커버 이미지 출처: SBS
세상은 오늘도 아름다워요.
정말?
우울감을 만성 감기처럼 안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다.
바깥에 나가면 공기가 상쾌하고 녹음이 짙고 햇살이 따사롭다는데,
솔직히 꽤 자주 나는,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누구나 평탄할 수만은 없는 롤러코스터 인생,
나 역시도 우여곡절을 몇 차례 겪으면서 길게 또는 짧게 우울감에 휩싸였다.
나만의 동굴에 들어가 버리거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우울감을 전염시키는 못할 짓도 많이 했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얼결에 극복도 해보고 다시 절망을 반복하기도 하면서 절망과 극복의 패턴을 터득하니
이제는 스스로 어느 상태인지 인지할 정도가 됐다.
우울함의 중심에 있더라도 더는 내가 이대로 끝날 것 같다거나 끝없이 낭떠러지로 가라앉는 기분은 없다.
시간이 지나고 또 우연히 자극제가 생기면 등 떠밀려서라도 의욕이 생기고 용기를 얻을 것을 알기에.
이름과 전공, 경력, 직업 등이 아닌 '은둔 경력 n년'으로 소개되는 지원자들.
"동굴에서 나온 것을 환영합니다."
은둔 생활을 하던 이들이 세상에 발을 내딛을 작은 계기를 얻기 위해 이 방탈출 프로젝트에 지원했다.
- 방송 출연을 신청할 정도의 극복 의지에 먼저 박수를 보낸다. -
벽 너머로 세상과 소통하는 일.
벽 한 칸을 사이에 두더라도 세상에 다가서는 일이 그 어떤 일보다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사람을 능숙하게 대하는 편인데도 누군가를 마주할 에너지가 없으면 대면을 회피해 버리는 내가 그렇다.
곰손카페 지원자들이 벽 뒤에서 손님 응대를 망설이는 모습이 십분 이해가 됐다.
카페라는 곳은 어쩌면 커피를 만드는 일보다 사람을 응대하는 일이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아르바이트를 해보니 그렇다.
만드는 사람에 따라 맛 차이나 만드는 속도 차이가 날 수는 있어도 대체로 매뉴얼이 있어 그대로만 하면 된다.
커피 장인이 운영하는 유서 깊은 로스터리 카페 같은 곳이 아닌 다음에야 메뉴 제조 실력은 결국에는 비슷해진다.
그런데 사람을 대하는 기술은 타고나기도 하고 저마다 다르다.
- 생각이 워낙 많고 똑 부러지는 멘트를 잘 못 하던 스무 살의 나는 일 못하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당시 겉으로 티는 안 냈지만 가장 우울했던 시기였기에 더 자신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
지원자 넷 중 한 명의 인터뷰에서 공감되는 말이 있었다.
마음에 병이 들면 1분 거리의 편의점도 못 가겠다는 말.
특히나 학교나 직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지 않는 이상
구직자나 프리랜서라면 스스로 외출 일정을 만들어야 '방탈출'이 가능하다.
그런데 다 뻔하고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친구를 만나는 일, 카페에 가서 노트북을 켜고 두세 시간씩 앉아있는 일,
마트나 상점에 가서 물건을 사는 일,
다 뻔한 일.
내가 계획한 대로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친구를 만나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겠지,
내가 준비한 대화 주제는 이 정도, 적당히 웃고 괴로움을 잠시 잊겠지,
카페는 내가 생각한 대로 적당히 붐비겠지, 직원들은 친절하지만 영혼 없는 말투로 음료를 건넬 것이고,
나는 늘 앉던 자리에 앉아 미뤘던 작업을 하며 시간을 보내겠지.
이 또한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예상한 전개대로 흘러가는 게 짜증 나고 절망스러울 때가 있다.
오랜만에 큰맘 먹고 집 밖으로 나가는데 우연히 마주하게 되는 희망이라든가 기적이라든가 하는 가슴 벅찬 게 왜 내 앞에 다가오지 않는 거야?
성인이 된 이후엔 크고 작게 반복이 잦았다.
원인을 찾자면, 잘나고 잘난 국내 톱클래스 아이들에게서 느끼는 뿌리 깊은 열등감이기도 하겠고
현직에 대한 불만족, 신세 한탄, 취업 후에도 멈출 수 없는 자기 계발에 대한 피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직 준비로 느끼는 절망감, 직장 생활과 구직 생활을 병행하며 느끼는 체력의 한계, 현실도 이상도 아닌 어디엔가 붕 떠있는 기분.
또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내 외모를 스스로 개선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분노, 정돈되지 않은 복잡한 집에 대한 스트레스도 한 몫했다.
다행히 내 가족은 나를 믿고 기다려줬다.
침대를 벗어나지 못할 때도 그저 밤잠을 설쳐 피곤했을 것이라 짐작해줬고
하루 중 겨우 잠시 카페에 갔다 왔어도 오늘은 온전히 바깥 활동하고 온 사람으로 취급해줬다.
스스로 힘으로 일어나 취미를 찾고 다른 일을 구하고 사람들을 만나러 나갈 때까지 바라봐줬다.
그래서인지 방송을 보면서 지원자 넷의 모습이 아픈 손가락처럼 느껴졌다.
지원자들이 동굴 속으로 들어갔던 계기는 저마다 다르지만
드라마 <더 글로리>와도 겹치는 부분이 있었고,
가정에서, 사회에서 저마다 느꼈던 절망감이 마음 깊이 자리 잡아 치유되지 못하고 곪고 있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무한 경쟁 사회, 메말라가는 각박한 세상에서 맛본 좌절과 상처.
또는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드는 후회나 죄책감.
그중 한 명은 인터뷰 도중 '괜찮은데 눈물이 난다'고 했다. 아픈 시간이 지나 무뎌졌을 뿐 정말 괜찮은 건 아니리라.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끼리 치유를 주고받는 게 보였다.
벽 뒤에 가려진 음료 제조 공간에서 지원자들끼리 칭찬하고 도닥여주며 힘든 순간을 넘겼다.
벽 바깥의 손님들은 말이 아닌 글로 응대롤 받아도, 직원의 얼굴을 보면서 주문할 수 없어도
곰손을 맞잡아주고 하이파이브를 하고 귀엽다고 까르르 웃었다.
손님들이 좋아하는 걸 보면서 기분이 좋았다는 지원자들을 보며 이들은 작은 호응에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인데, 하고 입 안에 쓴맛이 감돌았다.
이 프로젝트의 문을 연 카페사장 최준,
생각해보면 이 사람, 조금 느끼하긴 해도 나쁜 말을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모든 말이 예쁘다, 귀엽다, 사랑스럽다 같은 칭찬인 최준 사장이 지원자들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 "괜찮아"였던 것 같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삶이 송두리째 바뀌기를 바라지는 않는다는 지원자.
작은 의욕을 기대하며 세상 밖으로 어렵게 나왔으리라.
또 한 명은 에너지를 얻고 곰 탈을 벗고 맨 얼굴로 손님을 맞이하는 용기도 보였다.
짜릿했다고 했다.
내 탓이 아니란 걸, 스스로 위축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이들 주위의 최준 사장 같은 사람이 자주 말해주면 좋겠다.
또 개인적으로는 최근 <우리들의 블루스>를 뒤늦게 보고서 인물들에게서 치유받는 기분이 들어 백색소음처럼 자주 틀어놓곤 하는데, 드라마에 쓰였던 익숙한 ost가 배경음악으로 여러 차례 나왔던 게 마음이 편안했다.
더해 세상이 점점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으로 대체돼가는 게 안타깝다.
나 역시도 인터넷 쇼핑을 자주 하고 장보기조차 배송 서비스를 이용하니 말이다.
필요에 의해 억지로라도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마주하고 대화를 해야 가능한 일들이 많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한 켠에 든다. 혹시 알까? 마트에서 만난 시금치 파는 청년이 건넨 비닐봉지 한 장에 따뜻한 용기를 얻을지.
기획자의 시선에서 배움을 얻고자 본 다큐인데, 지원자의 시선으로 보게 됐던 방송이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자기만의 동굴은 있다.
그늘 속에서 외로움과 쓸쓸함에 살아가는 이들이 동굴 밖으로 나와 햇빛을 쬐며 용기 내 살아갈 수 있기를.
벽을 깨부순 네 명의 지원자들, 조금이나마 활기와 의욕을 찾고 다음 발걸음을 뗄 수 있다는 좋은 기억을 만들었기를.
무언가 할 수 있다는 확신의 경험을 선물한 프로젝트 같다.
지난해 10~11월 SBS에서 2회에 걸쳐 방영된 다큐멘터리로 유튜브에서 다시 볼 수 있다.
세상은 오늘도 아름다워요.
봄이 오면 벚꽃이 피고,
여름이 오면 세상이 푸르르고,
가을이 오면 울긋불긋 옷을 입고,
겨울이 오면 새하얗게 되죠.
저도 내일이 무서워요.
그치만, 다음 계절이 궁금해서
더 살 수 있어요.
세상의 아름다움에 항상 100% 공감할 수는 없지만
이 마음씨 따뜻한 손님의 메시지는 알 것만 같다.
곰손카페 지원자들의 앞날에 싱싱한 사계절이 몇십 번이고 무탈히 돌아오기를,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