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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시케 Oct 16. 2021

속아서 다행이다

호구가 되자 


영국으로 건너가 3년 정도 살며 새로운 환경에서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세워야 했던 시기,  한 가지 결심을 한 것이 있었다. 


그건, '호구가 되자'였다.


호구가 되지 않기 위해 너무 애쓰다 보니 마음이 닳는 것 같아서 한 생각이었다.


생각해보면 타지 사정에 밝지도 않고, 아이들이 셋이라 언제나 정신없는데, 빠삭하고 셈 바르게 일처리를 해낸다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기도 했다. 아무리 경계해도 나는 결국 당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있으니, 무너지기 쉬운 강둑을 지키기 위해 너무 애쓰기보다는 그 강둑을 '내가' 범람시키고 마음을 편히 먹고 싶었다. 


경제적 손해보다 더 큰 것이 마음을 잃는 손해라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 끝에 어디선가 들었던 한 이야기가

마음속에서 일렁이기에 글로 각색해보았다. 말하자면 이 글은... 호구 장려 글.







한 남자가 친구들과의 만남에 늦었습니다. 

남자는 오는 길에 

너무 불쌍한 할머니를 만났다고 했지요.



“맨발에, 집에 돌아갈 차비도 없다고 하시지, 

밖에 비가 오는데 우산도 없으시지, 

전화하면 데리러 올 자녀분도 없다고 하지, 

아침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 드셨다고 하시지.

기력도 쇠하시고 마음도 쪼그라드신듯한데, 

그냥 지나칠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국밥 한 그릇 사드리고 

집에 택시 타고 가시라고 

이만 원을 드리고 왔어. 

그러느라 늦었어.”


친구들은 한 목소리로 그를 타박합니다.



“야 이 바보야. 그걸 믿냐?”


“그 할머니 상습범이야. 

어제도, 그제도 같은 말을 하면서 거기에 있었어. "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그렇게 차비를 달라며 돈을 뜯어가.”


“듣기로 아들도 있고 집도 못 사는 게 아니래.”




친구들의 말을 듣고 난 남자는 계속 묻습니다.




“정말? 그게 정말이야?”



“그래 정말이라니까. 네가 속은 거야.”

“네가 당한 거야.”

“어떻게 그렇게 순진할 수가 있니?”



“정말? 정말?”



남자의 반문에 친구들은 

너무 그를 몰아세웠나 싶어 

일제히 말문을 닫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남자가 입은 손해에 속이 쓰립니다.


그런데 남자는 한참 생각하더니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쉽니다.



“아 정말 다행이다. 

나 정말 할머니가 걱정스러웠거든. 

택시비 2만 원 가지고 되려나 

내 번호라도 줬어야 했나, 

비도 오는데 감기에 걸리시진 않으실까. 

걱정스러워져서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았었거든. 


할머니가 불쌍한 할머니가 아니라니, 

아들도 있다니, 

집도 못 사는 게 아니라니, 


정말 다행이야.”




난 왜 이만큼 살고도 세상 물정을 잘 모르고 

순진하게 속는다고, 

크게 속은 것도 아니라 

아주 조금 손해 봤을 뿐인데도, 

작은 수셈으로 저 자신을 내려다보게 될 때 


그럴 때, 이 이야기가 생각나곤 합니다.





속지 않아서 도달하는 ‘다행’의 감각보다 

속은 끝에 도달하는 ‘다행’의 감각이 주는 아름다움을  느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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