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여덟 번째 이야기
세비야. 약 5년 반 전에 사랑하던 이 도시의 삶을 정리하고 이곳을 떠났었다. ("플라멩코에 미쳤던 여자" https://brunch.co.kr/@anachoi/1 참고) 그러고도 수십 번을 플라멩코 의상 일 관계로나 친구들을 보기 위해서 찾아가곤 했었다. 비록 세비야를 떠났지만 약 2년 반 전까지만 해도 나의 이탈리안 요리사 남편은 스페인 남부 바닷가에 레스토랑을 가지고 있었기에, 매년 여름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바닷가를 오가며 지냈었다. 그렇기에 세비야는 이탈리아와 포르투갈을 오가는 중간에 항상 잠시 머물러 가는 곳이었다.
첫째 아들이 아직 작았을 때만 해도 어디를 가도 아기띠에 들쳐업고 다녔기에 쉬웠으나, 아들이 조금 더 커서 걸어 다니기 시작하고, 둘째가 태어나고, 아이들이 점점 자신의 욕구를 충분히 요구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그냥 관광을 목적으로 오는 게 아닌 우리로써는,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그닥 쉽지가 않았다. 더욱이, 바다와 숲에서 자란 우리 아이들에게는, 세비야의 좁디 좁은 골목길에서 만나지는 자동차들과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바 bar들과 레스토랑들과 상점들은 별로 의미가 없었다. 아이들이 좀 더 커서 도시들이 주는 역사적 의미와 문화적인 미를 감상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기에, 도시가 아이들에게 줄 수 것이란 고작 놀이터, 공원, 서점, 달콤한 디저트나 아이스크림 정도? 게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선 쉽게 접하지 못하는 셀 수없이 늘어서 있는 상점들의 풍경은 아이들의 소비 욕구를 자극시킬 뿐이었다. 또한, 알라메다 Alameda에 (레스토랑들과 바들이 밀집되어 있는 광장으로, 놀이터와 바닥 분수에서 물이 나오고 여러 행사들이나 벼룩시장들이 주말에 열리곤 한다.) 아무렇게나 바닥에 굴러다니는 깨진 유리병 조각들과 쓰레기들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매번 세비야를 올 때마다 이 도시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한눈에 볼 수가 있다. 남편이 이곳에 왔었던 2002년에만 하더라도, 아직 유럽 내에서도 항공편이 거의 없었던 시골 중에 시골이었다. 내가 처음 도착했었던 10년 전의 세비야는 대도시인 서울에서 자란 나로서는, 자동차가 중심가를 가로지르기 쉽지 않은 구조의 이 작은 도시가, 걷거나 자전거로 모든 곳을 돌아다닐 수 있어서 좋았다. 반면에, 최근 몇년 사이에 엄청나게 늘어난 관광객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아이들의 걸음걸이로 세비야를 종횡무진 하려니 시간이 많이 걸려 행동 반견이 좁아져 갔다. 이런 아이들을 데리고, 예전에 자주 가던 카페나 화랑, 화방, 천 가게들을 다시 찾아갔을 때, 다른 상점으로 탈바꿈되어 있거나 상점을 닫아서 텅 비어있는 공간들과도 마주해야 했다. 도시의 변화하는 얼굴들과 바뀌지 않은 나의 기억 속의 세비야가 부딪히는 순간이다. 마치 있어야 할 퍼즐 조각이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10년이란 세월은 장소만을 바꾸어 놓는걸 의미하지 않는다. 예전에 내가 알던 플라멩코란, 진정한 플라멩코의 Magic time은, 공연이 이미 다 끝난 후 친구들과 이어지는 뒤풀이에서, 새벽녘까지 이어지는 끊이지 않는 이야기 중간중간에 플라멩코 아티스트들의 즉흥 노래, 연주, 춤사위 속에서 잠깐 왔다가 언제 왔었냐는 듯이 사라지는,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마법의 시간이 열리는 그 순간,,,,플라멩코를 만나다." https://brunch.co.kr/@anachoi/10 참고) 약 4-5년 전의 공포의 바람은 역사적인 플라멩코 따블라오 Flamenco Tablao(플라멩코 공연들을 여는 작은 바bar나 레스토랑)들을 문 닫게 했었었고, 상업적인 플라멩코 따블라오들의 횡패로 마땅히 대접받아야 할 중견 예술가들에게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적은 임금으로 공연 무대에 오르기를 강요하였다. 그리고 이 줒대있는 예술가들은 이런 횡패에도 꿎꿎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컬리티 높은 공연을 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였다. 현재 점차 점차 불어나는 관광객들과 더불어 새로운 플라멩코 따블라오들이 속속들이 생겼으나, 이제는 젊고 경험이 적은 플라멩카들이 적은 임금으로도 기꺼이 춤을 추게 되면서, 예전에 밤새도록 흥겹게 이어지던 플라멩코 Magic time이 일어나기도 전에, 일을 마치면 곧장 집으로 돌아가버리기 일쑤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예술가들을 비즈니스맨으로 탈바꿈시켜 버린 건 과연 누구일까?
보통 외국에 나와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나라에 다녀올 때마다 물가가 너무 올랐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듣곤 한다. 이들의 기준에서의 물가는 5년 전이든, 10년 전이든, 20년 전이든,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와 상관없이, 자신이 떠나왔을 때의 물가를 기준으로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내가 떠날 때만 해도 한국에서의 떡볶이 1인분 값이 1200원이었던 것에 비해, 요즈음 떡볶이를 사게 되면 보통 5000원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유로로 환전해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비싸다는 생각이 들지 않지만, 우리는 자동적으로 예전에 내가 구입했었던 원 ₩ 가격으로 생각을 하게 되고, 그렇게 생각하면 한국 물가가 갈 때마다 훅훅 올라감을 체감해버린다. (물론, 진짜 한국 물가가 많이 비싸졌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처럼, 내가 일정기간 살아오거나, 사랑하던 곳을 떠났다가 다시 찾아갔을 때, 우리는 모든 게 우리가 떠났었던 그때 그대로 있기를 알게 모르게 기대하나 보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도, 장소도 모두 변하기 마련이건만, 그곳은 그때 그대로이기를 바라나 보다. 내가 변했듯이, 그곳도 변했고, 계속 변해가고 있다.
마치 옛 연인과의 재회에서 예전에 내가 사랑했었던 그를 찾으려고 노력하듯이, 나는 세비야의 이곳저곳을 미친 듯이 돌아다니며 예전에 내가 사랑했었던 그때 그 세비야를 찾아 헤매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세비야에서 돌아와서, 마치 춤추기 위해서 태어난 듯한 나의 둘째 딸 가이아를 위해서 플라멩코 의상을 만들면서 예전에 플라멩카 댄서들의 의상을 만들었었던 때를 회상한다. 어쩌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를 나의 플라멩코 Magic time을 그리워하며 오늘도 미친듯이 웃으며 머리에 꽃을 달고, 아이들과 함께 플라멩코를 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