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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날로그 남샘 Jan 04. 2023

말 깨뜨리기(2)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면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음을 경험하기

  ‘경험 회피’는 ‘인지적 융합’에서 시작됩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과거의 경험은 말로 기억되고 평가됩니다. 만약, 과거의 경험이 불안이나 우울과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또는 다가올 순간에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불안과 우울을 습관적으로 부정적인 말과 짝지으면서, 불안하거나 우울한 것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 하기 때문이죠. 이처럼 ‘불안하거나 우울한 것은 나쁜 것이다.’라는 생각과 ‘융합’되면, 불안과 우울을 일으키는 경험 자체를 회피하게 됩니다. ‘인지적 융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지적 융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습관적으로 ‘생각’하고, 그 ‘생각’을 ‘사실’로 믿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를 가두는 말의 힘’ 활동에서 ‘부끄러운 실패’를 ‘만족한 실패’로 바꾸었던 것을 떠올려봅시다. 처음 실패에 어울리는 말을 떠올려보라고 했을 때, 아이들은 ‘부끄러운’, ‘창피한’, ‘짜증 나는’, ‘피하고 싶은’ 등 부정적인 단어들을 말했습니다. ‘부끄러운 실패’, ‘창피한 실패’, ‘짜증 나는 실패’, 그리고 ‘피하고 싶은 실패’는 우리에게 어떤 느낌을 주나요? 실패는 ‘말’ 일뿐인데, 우리는 어느덧 실패를 만나고 싶지 않거나 피해야 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판단’하게 되지 않았나요? 만약, 과거의 경험이 ‘실패’라는 단어로 기억되었다면, 우리는 ‘실패’로 기억된 경험과 비슷한 상황을 피하고자 노력하면서 ‘경험 회피’로 행동합니다.

  아이들에게 ‘실패’를 긍정적인 말로 꾸며보라고 하면, 한참을 생각합니다. ‘실패’를 부정적인 말과 짝짓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여자아이가 ‘부끄러운 실패’를 ‘만족한 실패’로 바꾸었습니다. ‘부끄러운 실패’는 부정적인 느낌을 주지만, ‘만족한 실패’는 실패를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합니다. 이처럼, 말은 말일뿐 꼭 그 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생각할 필요도, 사실이라고 믿을 이유도 없습니다. 과거의 경험이 실패로 기억되었다고 해서, 앞으로 만나게 될 과거의 경험과 비슷한 상황을 피하지 않아도 됩니다. 중요한 건, 말로 기억된 과거의 경험과 비슷한 상황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순간을 피하지 않고 온전히 경험하면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음을 체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때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음을 경험하면, 우리는 과거의 실패나 좌절로 기억된 비슷한 상황이 와도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을 ‘수용’한 경험은 실패와 좌절로 기억된 경험과 비슷한 상황을 ‘기꺼이 경험할 수 있는’ 용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ACT에서 말하는 ‘탈융합(Cognitive Defusion)’은 말이 가진 힘에서 거리를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경험을 말로 기억하기 때문에, 경험을 부정적인 말로 기억하면 그 경험도 부정적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실제 사건뿐만 아니라 생각만으로도 이와 관련된 감정을 경험합니다.

  ‘나는 재미없는 선생님이다.’라는 생각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 생각은 갑자기 생겨나지 않고, 과거의 경험들로부터 비롯됩니다. 열심히 준비한 수업이 아이들에게 호응이 없었던 기억, 아이들에게 들었던 옆 반 선생님은 재미있는데 우리 반 선생님은 재미가 없다는 말, 또는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않고 조용히 딴짓을 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등 과거의 사건들이 ‘나는 재미없는 선생님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한 번 생겨난 ‘나는 재미없는 선생님이다.’라는 생각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습니다. 혼자 있다가도 이 생각이 나면, 피하고 싶은 과거의 경험들이 같이 떠오르고, 불안, 창피함과 같은 감정을 경험합니다. 열심히 수업을 하다가도 딴짓을 하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 ‘내가 재미없으니까 아이들이 집중 못하고 있는 거겠지.’라고 생각하며 자신감을 잃기도 합니다. 결국, ‘나는 재미없는 선생님이다.’라는 생각을 사실로 믿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눈앞의 있는 학생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생각에 갇힙니다. 생각에 갇혀서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지 못하고 과거를 반복합니다. 서둘러 수업을 마무리하거나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흥밋거리를 제시하며 지금 이 순간을 모면하고자 합니다.

  ACT에서는 ‘인지적 융합’에 대한 대안으로 ‘탈융합’을 제안합니다. ‘탈융합’은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ACT에서 이야기하는 ‘탈융합’은 생각을 ‘사실’로 믿는 것에서 벗어나 생각에 ‘거리’를 두는 것을 말합니다. 생각은 ‘말’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생각에 ‘거리’를 둔다는 것은 말이 가진 힘에서 거리를 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나는 재미없는 선생님이다.’라는 생각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생들이 수업을 지루해하거나 집중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그 순간을 온전히 경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과거와 비슷하게 수업을 급히 마무리하거나 흥밋거리를 제시하지 말고, 수업을 계속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학생들이 선생님을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며 수업을 지루해 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 순간의 민망함과 초조함을 온전히 수용하면서, 정해진 계획에 맞게 천천히 수업을 마무리하는 선택을 한다면, 급히 수업을 마무리하거나 흥밋거리를 제시할 때와는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재미없는 선생님이다.’라는 생각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에 소모되던 시간과 힘을 지금 이 순간 함께 있는 학생들에게 집중하며 수업을 마무리하는데 쓸 수 있습니다. 생각은 날씨와 같아서 통제할 수 없지만, 날씨에 어울리는 행동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 수용-전념치료(Acceptance-Commitment Therapy): 원치 않는 생각과 감정을 없애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생각과 감정으로 고통받고 있는 자신을 무능력하거나 의지가 없는 것으로 탓하는 것을 고통의 원인으로 여기는 심리치료적 접근. 고통스러운 순간에 자기 자신을 판단하지 않고 자비롭게 바라보는 '자기-자비'를 치료의 핵심적인 요소로 여김.


* 흰곰: '수용-전념 치료'에서 말하는 불안과 우울과 같은 불편한 생각, 감정, 감각, 그리고 기억들


* 참고 도서

  - 이선영. (꼭 알고 싶은) 수용-전념 치료의 모든 것. 서울: 소울메이트, 2017.

  - Hayes, Steven C. 마음에서 빠져나와 삶 속으로 들어가라. 서울: 학지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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