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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날로그 남샘 Jan 08. 2023

'그러나’ 또는 ‘그리고’(1)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라 선택이다.

  마음은 이야기를 만들고, 기억을 이야기에 맞게 이어 붙입니다. 모든 순간이 기억되기보다는, 이야기에 어울리는 순간이 기억되거나 기억의 의미가 이야기에 맞게 변형되어 기억됩니다. 이야기가 논리적이고 합당할수록, 그 이야기를 만든 사람이 자기 자신임을 조금씩 잊어갑니다. 

  대인공포증을 가진 아이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던 기억, 가족들에게 소외되었던 경험은 대인공포증을 가질 수밖에 없는 논리적인 이유가 되고, ‘나는 대인공포증을 가진 사람이야.’라는 생각이 옳게 여겨집니다. 대인공포증을 가지게 된 이유가 합리적일수록 대인공포증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를 사실로 믿을수록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사회 활동을 피하는 방향으로 행동합니다.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를 사실이라고 믿고, 아이는 그 이야기의 등장인물로서 대인공포증을 가진 사람이 할 법한 행동들을 합니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에서 반복됩니다.

  대인공포증을 가진 아이에게 대인공포증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은 큰 효과가 없습니다. ‘나는 대인공포증을 가졌기 때문에 친구를 만들지 못하고 있어.’ 또는 ‘대인공포증 때문에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는 가고 싶지 않아.’와 같이 대인공포증은 불편한 행동을 반복하는 합리적인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대인공포증에서 벗어나는 법을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대인공포증으로 힘들었기 때문에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또는 대인공포증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아이를 도와주기 위해 부모님과 선생님께서 방법을 알려주셨을 수도 있습니다. 방법을 알고도 대인공포증을 극복하지 못할 때, 아이는 스스로를 의지가 없거나 무능력하다고 자책하면서 괴로움의 늪에 빠지기 쉽습니다.

  대인공포증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고 있음에도, 아이는 왜 대인공포증에서 빠져나오지 못할까요?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대인공포증이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대인공포증을 가진 아이는 친해지고 싶은 친구를 만날 때, ‘저 친구와 친해지고 싶어. 그러나 나는 대인공포증을 가지고 있어.’라고 생각하며 말을 걸기를 주저합니다. 이 생각은 대인공포증이 사라지지 않으면 친해지고 싶은 친구에게 말을 걸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친한 친구를 만들려면 먼저 대인공포증이 사라져야 한다고 믿게 되고, ‘대인공포증을 가지고 있으면 친한 친구를 만들지 못한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 친구와 친해지고 싶어. 그러나 나는 대인공포증을 가지고 있어.’에서 한 단어만 바꾸면, ‘대인공포증을 가지고 있으면 친한 친구를 만들지 못한다.’는 생각에 거리를 둘 수 있습니다. ‘저 친구와 친해지고 싶어. 그리고 나는 대인공포증을 가지고 있어.’는 어떤 느낌이 드나요? ‘그러나’를 ‘그리고’로 바꾸었을 뿐인데, ‘대인공포증이 있으면 친한 친구를 만들지 못한다.’는 생각과 거리를 둘 수 있지 않나요? 

  사람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 친구와 친해지고 싶어. 그러나 나는 대인공포증을 가지고 있어.’라는 생각을 가진 아이를 도와주기 위해서 대인공포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대인공포증이 문제이기 때문에 대인공포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는 것이죠. 하지만 대인공포증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았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대인공포증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또, 시간을 들여 대인공포증에서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친해지고 싶었던 친구를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아이가 대인공포증을 없애고 싶었던 이유를 살펴봅시다. 아이는 친구와 친해지고 싶었기 때문에, 대인공포증을 없애고 싶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 이 순간 아이가 원하는 것은 대인공포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친구와 친해지는 것입니다. ‘저 친구와 친해지고 싶어. 그러나 나는 대인공포증을 가지고 있어.’를 ‘저 친구와 친해지고 싶어. 그리고 나는 대인공포증을 가지고 있어.’로 바꾼다면, 아이에게는 ‘대인공포증을 가지고도 친구에게 말을 걸 것인지’ 또는 ‘대인공포증 때문에 친구에게 말을 거는 것을 포기할 것인지’의 두 가지 선택이 남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던, 대인공포증은 친구에게 말을 걸지 못하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대인공포증을 없애는데 쓸 시간과 힘을, 지금 이 순간 원하는 것을 하는데 쓸 수 있습니다. 대인공포증을 없앨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대인공포증을 가지고도 친구에게 말을 걸 수 있습니다.


* 수용-전념치료(Acceptance-Commitment Therapy): 원치 않는 생각과 감정을 없애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생각과 감정으로 고통받고 있는 자신을 무능력하거나 의지가 없는 것으로 탓하는 것을 고통의 원인으로 여기는 심리치료적 접근. 고통스러운 순간에 자기 자신을 판단하지 않고 자비롭게 바라보는 '자기-자비'를 치료의 핵심적인 요소로 여김.


* 흰곰: '수용-전념 치료'에서 말하는 불안과 우울과 같은 불편한 생각, 감정, 감각, 그리고 기억들


* 참고 도서

  - 이선영. (꼭 알고 싶은) 수용-전념 치료의 모든 것. 서울: 소울메이트, 2017.

  - Hayes, Steven C. 마음에서 빠져나와 삶 속으로 들어가라. 서울: 학지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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