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최대 빌런은 나다
시원하게 욕지거리를 하는 서도철을 보는 박선우. 선우의 눈은 웃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서늘하다.
감정이 읽히지 않는 선우의 눈동자 C.U.
시선을 느낀 도철도 선우를 본다. 둘 사이에 묘하게 흐르는 정적.
‘저 놈 좀 이상하다’ 도철도 선우를 뚫어져라 보고 그 눈으로 서서히 Zoom In.
영화 <베테랑 2>의 한 장면이다.
정확히 위와 같은 장면은 아니지만 두 사람의 눈빛 교환 씬이 있는 건 맞다. 액션 범죄 수사극에 어울리지 않는 클로즈업(C.U.) 씬이 유독 많았던 이번 영화는 그래서 약간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액션극의 대가 류승완 감독이 카메라가 잘생긴 정해인만 잡게 하는 실수를 했을 리는 없고 클로즈업 씬의 의도가 궁금했다.
그 의문은 배우 정해인의 한 인터뷰를 보고 풀렸다. 극 중에서 박선우라는 사이코패스 살인범 역할을 맡은 정해인은 사이코패스의 초점 없는 눈빛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감독과도 오랫동안 상의하여 스크린에 담긴 그 눈빛을 구현할 수 있었고, 감독은 그걸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았다. 그 이상한 눈을 바라보는 황정민의 의아한 눈빛까지!
감독은 정의로 가득 찬 경찰 선우가 정의롭지 못한 범죄를 저지른다는 딜레마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그의 공허한 눈빛을 보여주고자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클로즈업이 필수불가결했을 것이다. 들여다봐야 자세히 볼 수 있는 것이 눈동자이니까. 그래서 무리수를 둬서라도 카메라 렌즈를 최대한 당겨 관객이 그 눈빛을 느끼게 하려고 한 게 아닐까 싶다. 박선우의 눈빛을 제대로 보여줌으로써 그가 비범한 범인임을 각인시키려 했다면 감독의 의도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클로즈업은 ‘강조와 디테일’이 필요할 때 쓰는 카메라 기법이다. 방송구성작가로 일할 때도 드라마, 영화 시나리오를 습작할 때도 클로즈업을 꽤 많이 썼다.
클로즈업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가까이 보기
들여다 보기
자세히 보기
가까이 들여다봐야 자세히 볼 수 있는 것,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인 ‘클로즈업’.
지금이야말로 클로즈업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것 같다가도 실상 스스로에게 속은 적이 많았다. 가까이 들여다보다가도 ‘여기는 건드리지 말아야지!’라는 자체 차단 기능으로 인해 더 이상 깊은 속을 들여다보는 게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정작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아야 할 때 계속해서 물음표만 찍게 되었다.
나의 최대 빌런은 나다.
카메라가 빌런인 박선우의 눈빛을 들여다보듯이 나도 빌런인 나를 들여다봐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동안 숲을 멀리서만 지켜봤다면 이제는 숲 안으로 들어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땅에 떨어진 나뭇잎 하나까지 자세히 들여다봐야 할 때다.
파혼 이후 남자와의 거리 두기를 하고 있는 나를 ‘상처받은 불쌍한 여자’로 보는 시선이 싫었다.
연애를 하지 않고, 결혼에 대해 비관적인 건 내 선택일 뿐이지 상처를 받아서, 버림받을까 봐, 남자를 못 믿어서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조롱하듯 혹은 연민에 차서 나를 걱정하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애써 무시했다. 오히려 혼자여서 마음 편하고 자유롭다고 변명하면서.
하 지 만
클로즈업하여 들여다보면 나는 마음 편하고 자유롭지 않다. 나약해 빠져서 의지할 것을 찾아 헤매고 있다. 애인 혹은 배우자가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해 살고 있으면서 아닌 척, 괜찮은 척하고 있다. 의지하는 게 아니라 좋아서 하는 거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사실은 나의 가치를 알아보는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면서.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인정받을 만한 능력을 갖췄다고, 아직 그 시기가 오지 않은 것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위로하며 철벽방어를 하고 있다. 미련할 정도로 두터운 방어막을 두르고.
사실 그때부터 나를 속이고 살았던 것 같다.
그게 벌써 10년이다. 10년이면 혼자인 여자로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눈속임을 했겠는가? 이제는 10년 전의 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에게 속아 넘어갔다. 그래서 더더욱 나의 본모습을 들여다보는 일이 어려워졌고 점점 더 방치했던 게 아닐지… 지금처럼 살아야 외롭고 처량한 나를 보호할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게 아닐지…
나는 혼자인 게 좋지만 혼자이고 싶지 않다.
대담한 척 하지만 작은 일에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겁쟁이다.
인내심 많고 성실한 척 하지만 소문나지 않은 게으름뱅이다.
누군가는 나를 솔직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말한 것보다 말하지 않은 게 99% 더 많다.
그동안 고집불통 어른으로 살았던 건 이런 이유에서다.
나를 철저히 감추려다 보니 내 속을 들여다보는 사람을 만나면 화가 났다. 화낼 일이 아닌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상대방이 나와 맞지 않아서, 그가 싫어서라고 생각했는데 속마음을 들킬까 두려워서였을 것이다. 들켜버리면 애써 붙잡고 있던 썩은 동아줄마저 끊어질지 모르니까.
나를 클로즈업하여 들여다보면 불편한 감정에 휩싸인다. 또다시 도망갈 구실만 찾으며 익숙함으로 되돌아가려고 시도할지도 모른다.
<베테랑 2>에서 어렵게 잡은 박선우가 탈옥했다는 소식을 듣고 경찰청장이 이렇게 말한다.
“장난하냐?”
만일 내가 나를 들여다보는 일을 불편하다고 포기한다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탈옥한 박선우와 다를 게 없을 것이다.
그런 나를 보고 사람들은 말하겠지. “장난하냐?”라고. 어렵게 선택한 ‘불편한 열정’을 장난으로 끝낼 순 없는 일이다. 계속해서 나를 들여다보고, 나를 불편하게 하고, 나를 고집불통에서 구원하겠다고 뇌를 속여봐야겠다. 속이다 보면 10년 후엔 그런 나로 살아가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