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드라마틱한 사ㄹㅁ
당신만은 추억이 되지 않았습니다.
삶은 때로 짓궂은 장난으로 조용히 가만히 살고 싶은 나를 건드린다. 장난에 놀아나지 않으려 피하거나 모른 척해도 굳이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며 함께 진흙탕에서 뒹굴자고 손 내민다. 그렇게 원치 않는 동거를 하다 보면 어느새 고약했던 삶은 온순해지고 나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그 모습에, 그 자리에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아이들이 모두 가버린
텅 빈 운동장에 앉아 있기를 좋아했다.
그곳에서 어머니를 생각하고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언젠가 사라져 버린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정원(한석규 분)이 다림(심은하 분)을 만난 건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다. 다림에겐 아저씨로 불려도 아직 30대 초반인 젊은 정원에게 상냥한 다림의 등장은 기쁘지만 슬픈, 야속한 삶의 장난이다.
남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밥을 먹고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도 오늘이 끝은 아닐지 내일이 오긴 할지 불확실한 정원은 새로운 만남을 마냥 즐길 수가 없다. 그녀에게 다가가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 곧 세상에서 사라질 자신을 또렷하게 드러낼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의 장례식장에서 자신의 죽음을 미리 체험하고, 가족과의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며, 술에 취해 친구 앞에서 다림의 이름을 외치며 술주정도 부렸지만, 정원의 남은 삶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조용히 흘러간다. 슬며시 다가와 자리한 다림에 대한 마음도 조용히 하수구에 흘려보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난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랑을 하고 있다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생 앞에서 사랑을 시작한 정원은 하루가 부족하고 그녀를 매일 볼 수도 없음에도 조금도 서두르지 않는다. 사랑은 뜨겁게 왔다가도 차갑게 지나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전에 자신의 몸이 먼저 차갑게 식을 수도 있단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림이 웃으면 좋지만 그녀가 오지 않아도 서운해하거나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떠나야 한다는 사실도
함께 있고 싶다는 표현도
사랑한다는 말도
모두 가슴에만 묻어야 했다.
곁에서 고운 얼굴과 투덜대는 입과 찰랑이는 머리칼을 볼 순 없어도 그녀와의 생생한 추억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어 감사해한다. 서로 끌어안고 울며 힘든 이별을 하지 않고 가장 아름다운 다림의 사진에 그녀와의 생생한 만남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어 감사해한다.
지금 이대로 잠들고 싶어.
가슴으로 널 느끼며.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을 꾸고 싶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두려움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나에게 삶의 짓궂은 장난처럼 찾아온 당신이지만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나를 놀리고 더 큰 슬픔에 빠뜨리려고 당신이 온 게 아니라, 죽어가는 나를 살리려고 당신이 찾아왔다는 것을.
당신 웃음의 환함을 담고
당신 손의 따뜻함을 느끼고
당신 눈의 빛남을 기억하며
잠들 수 있어 다행입니다.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지만
우리의 짧은 추억이 당신에게도
8월에 왔다 간 크리스마스였길 바랍니다.
[지금 연재 중입니다]
월 : 어른의 Why?
화 : 일주일에 한번 부모님과 여행갑니다
수 : 어른의 Why?
목 : 글이 주는 위로-글쓰기 예찬
금 : 영화보다 드라마틱한 사ㄹㅁ
토 : 어른의 W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