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그림으로 만든 이야기

9. 그림으로 만든 이야기


나는 글을 배운 적이 없어. 가르쳐 준 사람이 없었거든. 그냥 장난감 퍼즐 가지고 놀면서, 그림책을 보면서 혼자 배운 거래.


ㄱ ㄴ ㄷ ㄹ ㅁ = A B C D E = 같음


미리 말하지만, 내가 천재라거나 똑똑해서는 아니야. 절대, 아니야!

어떻게 아냐고? 왜냐하면 나는 학교에서 지극히 평범한 뇌를 가진 학생 중 한 명이기 때문이지. 내가 보기에도 유독 똑똑한 친구들이 분명히 있어. 내 친구 조쉬는 진짜로 모르는 게 없고, 데보라의 글쓰기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해. 내가 글을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일찍 혼자 배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엄청나게 특별한 사건은 아니라는 뜻이야. 지금 대부분의 친구들은 비슷한 수준으로 책을 읽고 이야기를 쓰잖아?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기본적으로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엄마는 나에게 글을 한 번도 가르쳐 주지 않았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엄마, 아빠는 내가 글을 최대한 천천히 배우도록 안간힘을 썼대. 미국에서는 세 살이 되고 프리스쿨(Preschool: 유치원 전 2~4세 아이들을 위한 놀이학교)에 가면 알파벳과 단어를 배우기 시작해. 그때 이미 나는 알파벳과 거리의 표지판을 다 읽을 수 있었지. 그런데 프리스쿨에서 글을 더 열심히 가르칠 것이라는 소식에 엄마, 아빠는 더욱 실망했어. 글을 빨리 배우는 것이 너무 싫었대!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 진짜 이상하지 않아? 글을 배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니. 이해할 수 없었어.


“노아가 글을 천천히 배웠으면 했던 이유는 간단해. 글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면 그림은 그만 보게 되거든. 그림책을 즐기고 가지고 놀 수 있는 시간이 짧아지는 거야. 어렸을 때는 좋은 그림을 많이 보고 상상하고 그림 속에서 이야기를 찾고… 그렇게 뇌를 즐겁고 튼튼하게 만드는 시간인데, 글을 빨리 깨우쳐버리면 그만큼 기회가 줄어들거든.”


아! 역시, 또 ‘뇌’가 문제였어. 우리 엄마에게 뇌는 매우 소중한 것 같아. 엄마는 뇌의 주름과 건강을 걱정하는데 글을 배우는 것에도 뇌가 연결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니까!


11+11=1111


수학도 이렇게 잘하는데 말이지. 나의 뇌는 멀쩡하다고. 크큭!

내가 글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면서 책을 읽는 속도는 아주 빨라졌어. 솔직히 더는 그림을 잘 살펴보지 않고 글만 쭉쭉 읽고 책을 덮어버리게 되었지. 그림이 있어도 자동으로 눈이 글로 가는 것을 어쩌겠어. 내용이 궁금하잖아.

그 무렵일 거야. 한글이 완벽하지 않은 나에게 엄마는 외국어 그림책을 내밀기 시작했어. 여기서 외국어 그림책은 물론 한글 그림책 포함이야! 스페인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쓴 그림책은 물론이고 심지어 맛있는 음식 사진과 복잡한 만들기 과정이 빼곡하게 적힌 요리책도 있었어.


“엄마, 내가 이걸 어떻게 읽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른단 말이야!”

“읽으라고 준 것 아니야. 글은 신경 쓰지 말고 그림만 보면서 이야기를 만들어 봐.”


아하…! 그제야 알 것 같았지. 엄마는 여전히 뇌의 주름을 포기하지 않았던 거야. 내가 글을 읽느라 그림을 보지 않으니 이제는 아예 외국어 책을 준 것이지. 와, 엄마 승!

그렇게 외국어 책을 손에 쥐고 그림만 다시 보기 연습을 시작했어. 아기 때 그랬던 것처럼 그림 속에 숨은 그림, 비밀 이야기를 찾았지. 엄마랑 함께 볼 때도 많았어. 종종 내가 아기 때 즐겨 보던 책이라면서 글자를 스티커로 가리고는 이야기가 기억나는지 묻기도 했지. 처음에는 조금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다시 그림을 보는 일이 즐거워지기 시작했어.

아기 때 천 번은 봤을 거라는 내 그림책 <Goodnight Moon>을 요즘도 가끔 꺼내 보곤 해. 아기를 위한 두꺼운 보드북이고 글씨는 아주 조금 있거든. 그러니 글을 읽을 필요도 없어. 이 책은 비밀이 많아. 특히 그림이 참 재미있어. 매번 그림 속 새로운 주인공 찾을 수 있거든. 그리고 원래 이야기보다 10배쯤 더 긴 나만의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마음껏 상상하는 거야.

한국 그림책 <짜장면>은 내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줘. 사람들이 가을 운동회에서 어떤 게임을 하는지, 친구들은 무엇을 손에 들고 어떤 옷을 입고 뛰어다니는지 알 수 있지. 내가 기억하는 초등학교 운동장은 그날만큼은 마치 놀이공원처럼 변신하는 것 같아. 한 글자도 글을 읽을 필요는 없어. 그림만 보더라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운동회의 두근거림을 상상할 수 있거든.

우리집에는 식물을 키우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책도 많아. 집안과 바깥 정원에서 여러 종류의 꽃과 나무, 화초를 키우거든. 엄마가 중고마켓에서 하나, 둘 모은 보물책들이야. 책 속에는 엄마와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식물들이 등장해. 글씨는 눈이 아플 정도로 아주 작고 빼곡하지. 그래서 글은 안 읽어. 말이 어렵기도 하고 귀찮으니까. 대신 우리가 좋아하는 식물들을 찾아보면서 얼마나 예쁜가에 이야기 나누고, 언제쯤 키워볼까? 어렵지는 않을까? 우리가 사는 세인트루이스에서는 잘 자랄까? 고민하면서 함께 계획을 세워.

내가 다섯 살 때 세인트루이스로 이사 와서 처음으로 산 스투키는 가드닝 책 속에 화려한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해. 잘 자라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절대로 죽지 않거든. 게다가 엄마 스투키는 열심히 아기 스투키를 만들기도 해. 나는 가드닝 책에 등장하는 스투키 사진과 그림을 찾아보고 이야기도 만들었어.


제목: 나의 사랑 스투키


세인트루이스에 이사 오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일이었어요. 엄마와 함께 아이키아에 놀러 갔어요. 아이키아는 가구를 파는 곳이지만 예쁜 꽃과 화초, 커다란 나무와 화초도 많이 팔아요.

그때 처음 스투키를 발견했어요. 초록색, 하얀색 줄무늬가 있는 통통하고 뾰족한 식물이었어요. 너무 귀여워서 갖고 싶어 졌어요. 하지만 엄마는 생각이 달랐어요.


“이건 별로 안 예쁜데? 너무 못생긴 것 같아…”


나는 너무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엄마의 대답에 얼굴이 빨개졌어요. 그리고 슬퍼졌어요.


“앗, 노아야! 다시 자세히 보니까 아주 귀엽다. 그리고 굉장히 튼튼해 보이네? 엄마가 잘 못 본 것 같아. 이거 하나 사서 키워보자!”

“정말? 엄마도 진짜 좋아?”

“응, 좋아. 한 번 키워보자!”


우리는 스투키 다섯 개가 자라고 있는 화분 하나를 들고 돌아왔어요. 조심스럽게 토분으로 옮겨 심어주었지요. 엄마는 볼 때마다 예쁘다고 칭찬해주었어요. 나와 스투키는 기분이 좋았어요.

스투키는 내 방 창문 옆에서 자랐어요. 물은 자주 줄 필요는 없었지만 햇볕이 중요했지요. 햇볕이 많이 쏟아지는 곳을 따라 매일 햇빛 목욕을 시켜주었어요. 스투키는 쑥쑥 자랐어요. 내 방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뾰족하고 아주 작은 초록색 뿔이 빼꼼 흙 사이로 보였어요.


“엄마, 이게 뭐지?”

“어머나! 아기를 만들었어. 베이비 스투키야!”


믿을 수가 없었어요. 아기라니! 처음 아기가 올라오고 하나, 둘, 셋, 넷 모두 다섯 개의 아기 스투키가 태어났어요. 아기 스투키는 놀랍도록 빨리 키가 컸어요. 매일매일 쑥쑥 자랐어요. 금방 엄마의 키를 따라잡을 정도였어요.

지금도 스투키는 세 개의 화분에서 열심히 자라고 있어요. 화분 하나는 할머니에게 선물했으니 뉴올리언스에서도 잘 자라고 있을 거예요.

스투키는 참 건강하고 귀여워요. 일주일 전에도 아기 하나를 또 만들었어요!

나는 오래도록 스투키를 돌볼 거예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식물이니까요. 스투키를 처음 만난 것은 참 멋진 일이었어요.


지난여름, 책 속의 그림과 사진을 보면서 여러 개의 이야기를 만들었어. 그림을 보고 좋아하는 장면을 찾고 내 마음대로 이야기를 상상하고 만들어. 그리고 글로 써보는 거야. 그럼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이야기가 되거든. 이미 그림은 있으니까 엄청난 이득이지! 엄마는 내가 이렇게 만든 글을 모두 묶었고, 한 권의 작은 책으로 만들어줬어. 제목도 있어.


그림으로 만든 노아 이야기


어때, 재미있는 프로젝트지?

다시 일부러 그림만 보기 시작하니까 내가 읽을 수 있는 책, 읽기 어려운 책의 벽이 무너졌어. 보고 싶은 책은 다 꺼내서 보고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면 되니까. 요즘은 두꺼운 베이킹 책 그림을 보면서 세상에 백 가지도 넘게 있는 빵의 이름을 배우고, 제이미 올리버 요리 사진을 보며 만드는 방법과 과정, 맛을 상상해.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나 내가 잘 알고 있는 실제 사람들의 이야기와 마구 섞어보곤 하지. 또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줄까?


제목: 토마스의 바게트


바론 스트리트 앞 토마스의 빵집은 아침 일찍부터 빵을 사기 위해 줄은 선 사람들로 북적였어요. 낡고 작은 빵집에서 언제나 고소한 빵 냄새가 흘러나왔지요. 사람들은 침을 꼴깍꼴깍 삼켰어요.

빵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빵은 아저씨가 직접 만든 사워도우 바게트였어요.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쫄깃하고 부드러운 사워도우 바게트! 몇 분이 지나지 않아 금방 동이 나곤 했어요. 한 번 먹어 본 사람은 그 맛이 자꾸 생각나 찾고 또 찾게 되었어요. 사람들은 더 많은 바게트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어요. 하지만 토마스 아저씨가 말했죠.

“하루에 만들 수 있는 빵의 개수는 정해져 있어요. 오븐이 너무 작아서 이보다 더 많이 만들 수 없답니다. 미안해요!”

사람들은 이해했어요. 그래도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지요. 어떻게 더 많은 사람들이 토마스의 바게트를 먹을 수 있을까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어요. 그리고 기가 막히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12월 25일 새벽 2시, 토마스는 모든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시간에 홀로 일어나 빵을 만들기 위해 빵집으로 나섰어요. 그리고 빵집 앞에 도착한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어요. 빵집 앞에는 커다랗고 반짝반짝 빛나는 새 오븐이 있었어요. 빨간 봉투에 담긴 카드를 열자,


친애하는 토마스에게


우리가 조금씩 모아 새로운 오븐을 선물해요.

앞으로도 맛있는 빵 많이 만들어 주세요.

호! 호! 호!


동네 사람들로부터


크리스마스 선물로 크고 멋진 오븐을 선물 받은 토마스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그날 이후 토마스의 빵집은 고소한 빵 냄새가 10배는 더 멀리 퍼져나갔어요. 동네 사람들마다 양 손에 바게트를 들고 빵집을 나섰지요. 소문은 이웃 마을까지 퍼졌고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하지만 걱정 없어요. 커다란 오븐에서는 뚝딱뚝딱 바게트가 튀어나왔으니까요!


엄마가 즐겨보는 베이킹 책 <Bake from scratch>라는 책에 사워도우 바게트를 만드는 방법이 사진으로 자세히 나와있어. 나는 바게트를 진짜 좋아하거든! 그림을 보며 침을 흘리다가 내 친구 에이든의 아빠 토마스의 베이커리에서 즐겨먹던 빵이 너무 그리워졌어. 그래서 엄마랑 빵집 이야기를 상상하다가 만들어 본 이야기야. 어때, 웃기지 않아?

이게 내가 그림과 함께 가장 즐겁고 웃기고 편하게 이야기를 만들고 글쓰기를 연습하는 방법이야. 일단 말로 마음껏 떠들어. 입이 아프도록! 처음에는 어색하고 어려울 수도 있지만 한 번, 두 번 하다 보면 곧 즐거움을 찾게 될 거야. 친구랑 하나의 그림을 앞에 두고 10분 안에 각자 다른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어. 얼마나 다른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하지 않아?

세상의 그림은 이렇게 멋지다니까.

나는 8살이 되어서야 알았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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