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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chovy Jul 10. 2020

116. 팬티 자랑을 왜 저한테?

오늘 새벽, 박원순 서울 시장의 자살 뉴스를 듣게 되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죽음에 생판 남임에도 불구하고 잠시 멍한 기분이 들었다. 언론 매체에서는 며칠 전, 성추행 건으로 전 비서에서 고소를 당하고 심적 압박감이 심해 자살을 택한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나오고 있었다. 진실이 무엇인지 여부와 관계없이 유명인이 죽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분이 진짜 속옷만 입은 사진을 메신저로 전송했는지, 신체 접촉이 있었는지 밝혀지지도 못한 체 그저 죽음을 택했다는 것은 납득되지 않았다. 그리고 문득 내가 예전에 겪어던 성희롱 사건이 기억났다.


몇 년 전, 학원이 아닌 학생 집으로 직접 수업을 갔을 때였다. 토요일 점심시간쯤 수업을 하게 됐는데 아이가 다른 학원에서 돌아오는 길인데 조금 늦어진다는 연락을 받았고 나는 공부방에서 조용히 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기척이 들리는가 싶어 문 쪽을 바라보니 아이의 아버님으로 보이는 남자분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계셨다.


처음 뵙겠습니다. 과학 선생 ㅇㅇㅇ입니다.


라고 인사를 했음에도 나를 쳐다만 볼 뿐 한 마디 대꾸도 없이 본인 방으로 돌아가셨다.


예상보다 아이의 귀가가 늦어지고 있었고 나는 오자마자 바로 수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실험 준비를 하기로 했다. 이 수업은 탐구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한 실험 수업이었고 뭔가를 만들기 위해 칼질을 해야 해서 신문지를 깔아 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상주하는 도우미 아줌마에게 신문지를 찾아달라고 부탁하러 나가던 중 봐서는 안 될 장면을 보게 되었다. 아이의 공부방을 나오며 


이모님, 신문지 좀 주실 수 있나요?


라는 말을 외치며 거실로 나갔는데 도우미 아줌마는 보이지 않고 드로즈 팬티 한 장만 입은 남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얼른 고개를 돌리고 몸을 틀어 아이의 공부방으로 들어왔지만 심장이 벌렁벌렁 빠르게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의도를 가지고 저랬을까 설마 실수로 나왔는데 내가 우연히 본 걸까, 학생 엄마한테 얘기해야 하나,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휘감았다.


아이가 도착하고 2시간의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병신처럼 이건 성희롱이라고 대차게 따지지도 못한 데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수업도 다 하고 나오다니. 진짜 상 병신이 따로 없었다. 내게 팬티를 자랑하시던 분이 일반인이 아니었기에 솔직히 망설였던 것 같다. 내가 난리 친다고 사진을 찍거나 녹화한 것도 아닌데 증거도 없다고 발뺌하면 별 수 없다고 생각한 것도 있다. 진짜 역겨운 기분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 뱀 눈깔 같은 역겨운 시선이 생각나니 소름이 쫙 돋는 것 같았다.


더 이상 그 집 수업을 하는 것은 힘든 일인 것 같아 과외를 중단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미투 운동도 없던 때라 그냥 똥 밟았다 생각하며 잊기로 한 것이다. 지금은 그때의 그 선택을 후회하지만 그 순간에는 최선의 선택이라 판단했으니까. 유명인들의 미투 사건을 보며 몇 개의 얼굴을 가지고 살기에 저렇게 앞 뒤가 다른 걸까 궁금해진다. 그리고 용감하게 자신이 당한 미투를 공개했던 분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비겁하게 사실을 감췄던 나에게 부끄러움이 뭔지 알게 해 주었으니.


몰카, 미투 같은 이런 얘기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성숙한 사회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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