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란성쌍둥이로 태어났다. 날 닮은 동생과 평생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이다. 그런데 모든 행운을 가지고 태어나서일까? 나는 어려서부터 운이 굉장히 없었다. 매 순간 안 좋은 것은 전부 나에게로 다가왔다. 평소에 나는 나의 행운을 남들이 훔쳐가는 기분을 자주 느꼈다.
동생과 처음 핸드폰을 샀을 때였다.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아침마다 새로운 핸드폰을 잡기 위한 설렌 마음에 눈이 자동으로 떠졌다. 그런데 그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핸드폰 전원이 켜지지 않았다. 딱히 잘못한 건 없었는데 제품이 고장 난 것이다. 자세히 알아보니 불량이었고, 몇 개월 뒤에 또 다른 핸드폰을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며칠 전에 구매한 새로운 핸드폰이 또 말썽이었고, 다시 한번 구매를 하게 되었다. 새로운 물건을 구매하면, 예전에 가지고 있던 감정은 잊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당시 나는 새로운 핸드폰에 흥미가 없었다. 오히려 첫 핸드폰이 그리운 나머지 동생 핸드폰을 가지고 장난쳤다. 연속해서 3번이나 불량인 제품을 구매하기란 쉽지 않을 텐데 나는 그 정도로 운이 없었다.
친구들과 장난치며 놀면 항상 나만 걸려 혼이 났다. 그렇게 태어났을 때 모든 운을 다 써버린 나의 주변엔 불행이 가득했다. 그런데 엄마에게 하소연하면 '너는 세상에 빛이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보다 항상 눈에 띄게 되어 있다'라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이렇게 말해주는 엄마가 있다는 건 큰 행운이었다. 적어도 집으로 돌아왔을 땐 행운과 불행이 공존할 수 있었다.
2012년 추운 겨울 입대했을 때 잊고 있던 나의 불행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훈련소에 지내는 기간 동안 내가 가진 장구류는 모두 불량이었고, 심지어 동기들은 일주일에 한 번 서는 불침번 근무를 나는 순서가 꼬여 두 번씩 했다. 반면에 내 옆에 있는 친구의 장구류는 최상급이었고, 불침번 근무를 안 할 정도로 운이 좋았다. 나보다 운이 좋아 보였던 그 친구의 별명은 ‘럭키 가이’였다. ‘그래 내가 가진 행운을 남들이 가져간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야’며 스스로 불행하다는 걸 감추려 애썼다.
2014년 군대를 전역하고 위병소를 나올 때 나는 이 세상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약간 아쉬움도 있었지만, 해방된 기분이 더 크기에 발걸음이 정말 가벼웠다. 해외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학교를 복학해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다. 성취감과 동시에 장학금도 받았다.
전국 S.F.C(Student For Christ) 학생 신앙운동 학원 부총무로 일하게 되었으며 600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등 전역 후 내가 그린 모습들이 상상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있던 것이었다. 나에게 있던 ‘불운’이 잊혀 가고 있을 정도로 행복했다.
한 학기를 마치고 동네 친구들과 재미있게 뛰어놀다가 넘어진 다음날이었다. 갑자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일어서기 힘들 정도로 허리에 통증이 생겼다. 물을 마시면 목에 뼈가 걸린 것처럼 느껴졌다. ‘어제저녁에 먹은 치킨이 목에 걸렸나’ 생각하며 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잠을 아무리 많이 자도 피곤했다. 엄마는 매일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놀고 집에 들어왔기 때문에 피곤한 것이니 앞으론 일찍 들어와서 제대로 된 생활을 하면 금방 나아질 것이라 이야기했다. 그렇게 며칠 뒤 여전히 피곤했다. 심지어 피곤함이 도를 지나치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다 같이 게임을 하고 있는데 혼자 마우스를 잡은 채 졸고 있었다. 분명 10시간 넘게 잠을 잤는데도 말이다.
가슴 통증은 더 답답해졌고, 밥을 조금만 먹어도 포만감이 느껴졌다. 저녁을 같이 먹던 친구에게 ‘가슴이 너무 답답하고 잠을 자도 너무 피곤해 아무래도 죽을병에 걸린 거 아닐까?’ 하며 장난을 쳤다. 당시엔 큰 병이라 생각하지 못했고, 가만히 있으면 자연스럽게 치유될 것이라 생각했다.
한 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 한 달째 되는 날 가족끼리 여름휴가를 갔을 때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피곤함은 더 심해졌고, 샤워를 하던 중 가슴 통증으로 그 자리에 쓰러지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정말 큰일이 생겼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바로 동네 병원에 갔다. 제일 심한 건 가슴 통증과 답답함이었기에 X-ray를 먼저 찍어봤다. 당시 의사 선생님이 사진 결과를 보면서 “신생아 얼굴 크기 정도의 종양이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평소에 운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이 정도 종양은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경솔하게도 별거 아니라 생각했다. 안 좋은 결과에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수술만 하면 나을 수 있다는 말과 대학병원에서 다시 한번 검사를 받으라는 소견서를 받아왔다. 대학병원으로 가서 조직 검사를 마치고 나는 친구들과 계곡에 놀러 갔다. 가슴 통증은 여전히 심했고, 당연히 재미있게 놀지 못했다. 방 안에서 누워만 있었다.
다음날 결과가 좋지 않아서 입원하라는 병원 전화를 받고 입원을 했다. 내가 처음 진단받은 병명은 ‘종격동 종양’이었다. 종격동이란 심장과 폐 사이의 공간을 말한다.
병원이 동네에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은 매일 병문안을 왔다. 거의 열 명이 넘는 친구들이 자주 놀러 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놀았다. 나의 병원 생활은 지루할 틈 없이 없었다. 그리고 종양은 수술로 나을 수 있다는 선생님 말에 큰 걱정 없이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병원에 입원했는데 2주 동안 아무런 치료를 받지 못했다. 그저 수액만 꼽고 있었다. 나는 수술 날짜를 잡는 게 이렇게 오래 걸리는구나 생각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혈소판 수치가 너무 안 좋아 피 주사(수혈)를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엄마가 급하게 병원으로 왔다. 멀쩡한 아들에게 수혈을 하는 건 이해가 안 된다며 좀 더 큰 대학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받아보고 싶으니 소견서를 작성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가게 된 병원이 ‘서울아산병원’이다.
동네 병원을 정리하고 아산병원 응급실에서 몇 가지 검사를 하고 집에 왔다. 너무 피곤해 잠에 들었는데 엄마 통화 소리에 잠시 눈이 떠졌다. 그리고 수화기 넘어 ‘골수 검사’ 준비를 해오라는 말이 들렸다. 설마 내 이야기는 아니겠지 하며 다시 자려했지만 불안해 잠이 오지 않았다. 내 이야기가 맞았다. 내일 아침 골수 검사를 해야 한다는 말에 밤을 새우고 병원을 갔다. 옷이 다 젖을 정도로 긴장을 했다. 얼마나 아플지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5년 8월 27일 나는 생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골수 검사 결과는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림프종’으로 보이지만, ‘백혈병’에 조금 더 가까울 수 있다는 말이었다. 골수 내 암세포가 88%였고, 9월 1일부터 바로 치료 시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응급으로 입원을 했고, 주치의 교수님이 배정되었다. 나의 최종 병명은 한 번에 외워지지도 않을 정도로 길었다. ‘T 세포성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이었다. 일종에 혈액암으로 임파선 계통에 발생한 원인 불명 악성 종양이 심장과 폐 사이에 신생아 크기 정도의 종양이 자리 잡고 있었다.
“1년에 7명 정도 걸리는 병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다 치료할 수 있습니다.”
주치의 교수님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나와 엄마를 안심시켰다. 수술을 통한 치료는 굉장히 위험하고, 약물 치료를 통해 치료할 계획이라고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속으로 로또에 당첨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정말 극악의 불운인 로또 말이다. 앞으로 나는 무엇을 의지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