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에서 뉴욕 - 2022년 6월 25일 토요일
2022년 6월 20일, 팀원들과 함께 시애틀 타코마 공항에 내렸다. 24일까지는 공식적으로 출장 일정이었고 혼자 있을 때는 화장실에 있을 때와 잠잘 때 뿐이었다. 6월 말 시애틀의 날씨는 더할 나위없이 좋았다. 햇볕이 쨍쨍하고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깨끗한 하늘과는 다르게 숙소가 위치한 다운타운 길바닥은 각종 오물에 찌들어 있었고 그 길 위에는 마약에 절어있는 노숙자들이 게임 속 NPC처럼 우릴 맞이했다. 가장 친한 팀원에게 아침마다 같이 시티 러닝을 하자며 운동복 꼭 챙겨오라고 몇날 며칠을 설득했는데, 막상 도착해 보니 러닝은 커녕 돌아다니다가 노숙자가 던진 빵에나 안 맞으면 다행인 동네였다(다른 동료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
다운타운과 항구에서 멀어져 내륙 쪽 동네로 들어갈 수록 더 안전하고 깨끗한 구역인 것을 거의 떠날 때가 돼서야 알았다. 어떤 레스토랑을 가도 모든 음식이 소금 한 통을 다 부은 것 같았다. 미국식 간에 질려버린 한국 직장인들은 회사 앞 베트남 쌀국수와, 소주 한 병에 13달러인 <소주 안주>란 이름의 '코리안 바'에서 찾아낸 부대찌개로 연명했다. 미국에서 먹는 멕시칸은 맛있을 것이란 환상을 무참히 깨준 회사 캠퍼스 근처의 식당에서 시애틀 주민에게 "이곳은 아웃도어 액티비티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야, 시내에 클럽도 없어 - 이름이 클럽인 곳은 있지만 거기는 클럽이 아냐."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 조언에도 불구하고 다들 어디 재밌게 술 마실 곳이 없나 밤마다 뭉쳐서 동네를 배회했고 그 때마다 유럽 지사에서 온 백인들이 마리화나를 피우며 똑같이 골목길을 뺑뺑 도는 것을 목격했다.
출장 일정도 빡빡 했고 다들 시차 적응에 실패해 좀비 같은 눈으로 캠퍼스를 떠돌았지만 나는 어떤 불평 불만도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매일을 지냈다. 항상 함께 몰려 다니며 정신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한국인 동료들이 있었기에 초행길에 무언가 잘못 될까봐 노심초사 할 필요가 없었다. 일주일 내내의 스케줄이 이미 다 짜여져 있었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거나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게 될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해가 지면 깨끗하게 청소 돼 있는, 회사 비용으로 예약한 널따란 하야트 리젠시의 내 방으로 돌아오면 됐다.
토요일인 25일부터가 진짜 나의 휴일이지만 오늘부터는 모든 게 정반대가 되어 버렸다 - 여기서부터는 순간의 생각을 메모하기 위해 현장에서 부지런히 음성 메모를 남겼다. 밤새 미합중국을 횡단해 날아가는 델타 비행기 안에서 수면유도제를 먹으며 나는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을 수록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걸 깨달았다. 타코마 공항에서 보안 검색의 한없이 긴 줄에 서서, JFK 공항에 내려 짐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한국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인스타그램도 켜 보고 카카오톡도 켜 봤지만 이건 대화라고 할 수 없다. 휴가 동안 반드시 완독 하고 가겠다고 결심한 책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를 꺼내 들었지만 여전히 시간은 느리게만 간다.
맨해튼에 아침 일찍 도착해서 바로 호텔로 갔는데 전날 모든 방이 풀 부킹이라 얼리 체크인이 안 된다고 한다. 이 메모를 녹음하는 지금은 오전 아홉 시다. 그럼 체크인까지 여섯 시간이 남았다. 씻지 않은지 24시간이 지났고 비행기에 앉은 채로 네 시간 정도 쪽잠을 잔게 수면의 전부라 정신이 몽롱하다. 핸드폰에 대고 음성으로 메모를 남기고 있는데 호텔 직원이 로비에 있는 머신에 커피를 채우러 들어왔다. 저 사람은 내가 한국인과 통화를 하고 있는 줄 알까? 그냥 쉬고 노는 것이 휴가라 생각했는데, 놀기 위해 또 계획을 세우고 타임라인을 체크해야 한다니 너무 괴롭다. 닥쳐서 아무것이나 하면 되지 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되니 맘대로 안된다. 어디를 가야할지, 오늘의 동선은 어떻게 짜야할지 고민을 하다가 스트레스를 한껏 받아 신경이 예민해진다. 365일 중에 5일 정도는 되는 대로 지내도 되지 않나, 맘대로 하려고 휴가를 가는거 아닌가 - 같은 생각까지 이어지며 거의 자포자기에 이른다. 근데 여기 계속 죽치고 있으면 청소부들한테 민폐일것 같아 잠깐 센트럴 파크라도 다녀와야 할 것 같다.
여기까지 쓰고 일어나서 나갔더니 호텔 바로 앞에 시티바이크(Citibike)들이 줄지어 도킹돼 있었다. 서울에서도 따릉이를 거의 타지 않았지만 계속 걷기엔 발바닥이 너무 아프고(이미 시애틀에서 하루 평균 1.5만보 걸음) 택시를 타자니 가격이 부담스러워 자전거를 타면 딱 좋겠다 싶었다. 한 번의 결제 실수로 키오스크에서 15달러를 날리고, 환불 방법을 찾자니 귀찮아서 '멍청비용'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몇분을 헤맨 뒤 Lyft 앱을 깔아서 무사히 자전거 대여를 활성화 했다. 약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센트럴 파크를 지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으로 가기로 했다. 토요일 아침의 센트럴 파크 입구는 이미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고, 다른 자전거와 부딪힐 뻔한 러너가 소리지르며 욕을 하고 있었고, 줄지어 선 말들의 똥냄새가 진동했다. 하지만 앞으로 잘 나가지 않는 자전거 바퀴의 페달을 힘주어 굴러 공원 안으로 나아가자 금새 여름의 녹음이 머리 위로 우거졌다. 여전히 말똥냄새는 났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정도의 기분 좋음이 밀려왔다. 선명한 햇빛과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자전거 타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공원을 빠져나가 5번가를 가로질러 올라가며 나는 토요일 아침 이 동네에는 거주민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고 전부 백인인 것을, 아무도 공공 자전거나 공유 퀵보드를 타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모두 룰루레몬 혹은 에일로 같은 브랜드의 스포츠 브라와 레깅스를 입고 있었고 스웻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동양인인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곳에 나처럼 생긴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위화감 속에 갑자기 주눅이 들어 자전거 속력을 줄였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도착해 입구에 줄을 서자 그제야, 영어가 아닌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과 한국인들 속에 파묻힐 수 있었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은 10년전에 봤을 때와 여전히 똑같았다. https://brunch.co.kr/@andgoodluck/65
발바닥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체크인 시간에 맞춰 호텔에 돌아와 겨우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호텔 바로 옆 블록에 위치한 현대 미술관으로 향했다. 발바닥이 덜 아프겠지 생각하며 간편한 슬리퍼를 신고 걸어갔다. 그 곳도 10년 전 내 기억 속 그대로였다. https://brunch.co.kr/@andgoodluck/69 결국 달라진 것은 나 자신 뿐이었는데 뭐든지 쉽게 질리는 내 성격 탓인지, 혹은 이제 그런 시대가 되어 버린 건지, '현대미술', '컨템포러리' 자체가 구태의연 해졌단 느낌을 받았다. 아니면 뭔가를 보며 새롭게 경탄하기에 오늘 내가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모른다. 시애틀에서부터 계속 잠이 부족했고 시차 적응의 개념 자체를 못 느낄 정도로 피곤했던 탓에 현대미술관을 나와 저녁으로 뭘 먹을지 고민할 새도 없이, 다시 방에 돌아와 그냥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