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에 관한 좋은 비유가 있다.
손가락의 비유다.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가리키면서, 지적하는 모양을 해보자. 집게손가락이 선두로 나서며, 권총 모양으로, 상대방을 향하게 된다. 엄지는 접힐 수도 있고 위로 향할 수도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집게손가락과 같은 방향을 가리키기도 한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나머지 손가락은 어떨까? 중지, 약지, 새끼손가락 이 세 손가락은 자기 자신을 향한다. 이 모양의 의미를 설명하면 이렇다. 누군가를 지적할 때, 하나의 손가락은 상대방을 향하지만, 세 손가락은 나를 향한다. 누군가를 지적하거나 나무랄 때, 자기한테 더 많은 손가락이 향한다는 말이다.
내가 하는 말을 잘 살펴보면, 그렇다.
나 자신도 잘 지키지 못하는 말을 종종 한다. 말하고 나서 뜨끔할 때도 있다. ‘그래! 나도 잘 지키지 못하고 있는데….’라며, 살며시 반성하기도 한다. 아마도, 방어기제가 작동한 게 아닐지 싶다. 강한 부정이랄까?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속담하고도 결이 비슷하다. 지켜야 한다는 걸 알지만 나도 잘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더 강하게 이야기했는지도 모른다. 위선자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좋은 효과도 있다. 다짐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느슨했던 마음을 조이면서, 의식하고 잘 지키자고 다짐하게 된다.
책임감이랄까?
사람은 최소한, 자기가 한 말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느끼지 않는 사람을 철면피라고 한다. 철면피는 그리 흔하지 않다. 대체로 사람은,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는 일말의 책임을 느낀다. 실제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양심의 가책은 느낀다는 말이다. 양심이 자기 마음을 계속 찌르는 것을 느끼며, 조금씩 변화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양심이며 책임감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행동의 변화를 불러오길 바란다면,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게 좋다. 지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말하도록 해야 한다.
지적은 일방적이다.
공 던지기로 따지면, 받을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던지기만 하는 거다. 그 공을 받을지 말지는, 듣는 사람 몫이 되는 거다. 받으면 변하는 거고 그렇지 않다면? 도로 아미타불이 되는 거다. 내가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영향을 주었으면 한다면, 공을 그 사람이 받을 수 있도록 주어야 한다. 받을 수 있도록 준다는 건, 그 사람이 다시 던질 수 있게 해준다는 말과 같다. 공을 받아야 던질 수 있으니 말이다. 공을 다시 던질 수 있게 한다는 건, 그 사람에게 말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하면 될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이렇게 질문하는 거다.
“어떻게 생각해?”
이 간단한 질문의 힘은 매우 크다. 내 생각만 일방적으로 전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이 질문을 들은 사람은, 말이 정말 통하지 않은 사람이라 여기지 않는 이상,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게 된다. 들은 말에 동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등에 대해 자기 생각을 이야기한다. 동의한다면 자기 행동을 어떻게 변화할지를 이야기한다. 동의하지 않는다면, 동의할 수 없는 현재 상황 등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해의 폭이 넓어지게 되고, 서로 합의하는 대화를 하게 되는 거다.
지적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표현의 느낌이 좋지 않아서 그렇지, 생각해서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이라는 말도 있듯이, 사람이 싫으면 아예 말도 하지 않는다. 어쩌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한테 더 많이 지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표현 방법을 조금만 변화시키면 많은 부분이 달라진다.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마지막에 한 마디만 물어보면 된다. 그 사람이 이야기할 기회를 주고, 자기가 한 말을 지킬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거다. 대화할 때 이 표현은, 요리로 치면, 다시다 같은 표현이다. 잘 활용하면 좋다. 이 글에 대해서도 이렇게 묻고 싶다.
“어떻게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