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그릇에 묻어있는 오래된 자국
한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화창한 봄날, 햇볕을 쐬기 위해 커튼을 젖혔다. 눈을 지그시 감고 햇볕에 따뜻한 기운을 얼굴로 받아들였다. 잠시 그렇게 포근함을 느끼다 눈을 살며시 떴다. 눈에 들어온 것은, 옆집 마당에 널어놓은 빨래였다. ‘빨아서 널어놨을 텐데, 지저분하네?’ 할아버지는 빨랫줄에 걸려있는 빨래가 깨끗하지 않은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할머니가 방문을 열고 나오면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옆집 빨래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할머니는 그 얘기를 듣고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밖으로 나가 할아버지와 유리문을 사이로 마주 보고 섰다. 그리고 할머니는 수건으로 유리문을 닦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눈에 빨래가 지저분하게 보인 것은, 빨래가 지저분한 것이 아니라, 유리 문이 지저분했던 것이었다.
비슷한 얘기로, 색안경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편견’을 네이버 사전에서 찾아보면, 비슷한 말에 색안경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만큼 색안경은, 편견을 설명하는 보편적인 용어가 됐다는 말이다. 지저분한 유리문이든 색안경이든, 결론은,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문제라는 사실이다. 지저분하게 보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이유를, 한 번 더 생각하지 않은 마음이 문제라 할 수 있다. ‘사람은 오로지 가슴으로만 올바로 볼 수 있다.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생텍쥐페리의 말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깨끗한 밥을 담아도 그릇이 더러우면, 밥에 더러운 것이 묻어, 더러운 밥이 된다.
하얀 쌀밥을 그릇에 담았는데 그릇 안에 검은 숯 가루가 있다면, 숯 가루가 묻어, 검은 밥이 된다. 외부의 상황이 내 안에 들어올 때, 그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없다면, 변질할 수 있다. 이것을 ‘편견’이라 부른다. 외부의 상황을 다른 사람과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이 보고 느껴지는 것만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주변의 의견을 듣거나 그 상황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 없이, 보이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판단한다.
필자는 마음 그릇을 닦기 위해 매일 새벽, 기도와 묵상을 한다.
여러 사정으로 간단하게 하거나 이동 중에 하기도 하지만, 하루라도 거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잘 닦아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싱크대에 오랜 시간 묻어있던 국물 자국이 잘 닦이지 않는 것처럼. 오랜 시간 밥그릇에 붙어있어, 잘 떨어지지 않는 딱딱한 밥풀처럼. 잘 닦이거나 떨어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미리 닦을걸.’, ‘미리 물에 담가 둘걸.’ 하며 생각하지만, 이런 상황은 반복된다. 몰라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 귀찮아서 하지 않았다.
마음 그릇에 잘 닦이지 않는 부분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잘 닦이지 않아서 잘 지워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런 것 같다.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억울하다는 생각과 손해라는 생각이 그렇게 하지 않게 발목을 잡았다. 억지로라도 닦아내는 것이 좋은지, 마음이 갈 때 닦는 것이 좋은지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언제라도, 닦아야 하는 사람은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만 잊지 않는다면, 언제 닦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