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 확신

by 청리성 김작가
『마음에 깊이 뿌리 박힌 한 문장이 있어야 가능한 것으로,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선택을 하는데, 마음에 명확하게 꽂히는, 그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그래서 선택을 타인에게 넘긴다. 가장 흔한 예가, 식사 메뉴를 고르는 일 같은 거다. 후배하고 밥을 먹으러 갈 때, “뭐 먹을래?”라고 물으면, 거의 “아무거나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정말 아무거나 먹어도 상관없다는 말인지, 배려 차원에서 선택권을 넘기겠다는 건지 알 수 없다. 아! 전자의 경우는 알 방법이 있다. 메뉴를 얘기했는데, 표정이 쭈그러지거나 대답을 주저주저할 때다. 딱히 원하는 것 없지만, 싫은 건 명확하다는 말이다.

확신이 없다는 건, 의견이 명확하지 않다는 의미다.

갈지 말지 혹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같이, 둘 중 하나의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자의든 타의든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이때, 자기 의견이 명확하지 않으면 확신이 서지 않는다. 확신이 서지 않으면, 결정하기 어렵다. 가장 최악의 결정은, 미루고 미루다 아무런 선택도 하지 못하고, 선택당하게 되는 상황이다. 그 어떤 선택도 만족할 수 없다. 자신이 한,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확신이 필요한 시대다.

세상이 어수선하니 이리저리 흔들리기에 십상이다. 누가 이렇다고 하면 이런가 보다 하고 있고, 저렇다고 하면 저런가 보다 하고 있다. 그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사실 어떤 의견이 옳은지, 지금은 알 수 없다. 결과론적이기 때문이다. 단기간의 결과가 아닌, 장기간의 결과를 봐야 하기에 더욱이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다.


우리는 익숙해져 있다.

어떤 선택을 할 때, 특히 옳고 그름을 구별할 때, 타인의 생각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다수결이 진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수결에 따르려는 관성이 있다. 다수의 의견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옳고 그름을 다수로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옳고 그름의 판단은 가치의 문제이지, 취향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계절에 따라 색이 변하는 잎이 아니라, 언제나 깊이 박혀있는 뿌리여야 한다는 말이다.

확률 게임에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

최소한의,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 그냥 휩쓸리는 그런 선택 말고,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판단하는 그런 선택 말이다. 또 하나는 헷갈리지 말아야 한다. 너무 군중의 생각에 파묻혀있으면, 타인의 생각이, 마치 자기 생각인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다.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격이다. 계속 흔들리고 있었으니, 흔들리는 게 일반적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마음에, 단단히 뿌리박은, 한 문장이 필요하다.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고, 그 누가 흔들어도 뽑히지 않을 한 문장이 필요하다. 그 문장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노력해야 한다. 마음에 고요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매섭게 휘몰아치는 태풍의 한 가운데는 매우 고요하다고 한다. 인생 문장을 찾으면 그렇다.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한가운데에 자리할 수 있고,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다. 나의 한 문장은 이렇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56. 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