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사람,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차라리 없으면 좋을 사람. 후반부로 갈수록 존재감이 떨어집니다. 누가 구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람을 쓸모로 구분한다는 게, 좀 씁쓸하지만 말이죠. 어느 공동체를 떠올려도, 자연스레 머릿속으로 구분이 지어집니다. 그렇다고 모든 공동체가,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부류의 사람이 없는 공동체도, 분명히 있습니다. 서로가 배려하고 도움을 주려고 하는 공동체가 그렇습니다. 자기 이익이나 편의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그런 공동체인 거죠. 이상적인 공동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부류도 달라집니다.
사람들이 공통으로 분류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혀 다른 위치에 속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를 중심에 두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A와 B는 상극인데, B와 C는 매우 가까운 사이입니다. A의 처지에서 B는 세 번째 부류에 포함될 것이고, C에게 B는 첫 번째 부류에 분류될 겁니다. 같은 사람이지만, 분류하는 부류는 다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A와 C가 가까운 사이일 때도 있습니다.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순 없다는 말이 증명되는 사례입니다.
공통으로, 세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몇 번을 겪어봤는데요. 정말 힘듭니다. 모든 것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내로남불이라고 하죠? 극에 달합니다. 일부러 그러는지 아니면 골탕 먹이려고 그러는지 헷갈릴 때도 있습니다. 그만큼 비상식적인 말과 행동을 하기 때문인 거죠. 정말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앞뒤 따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은 거죠. 어딘가에 제대로 부딪혀야 멈출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누구 하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유는 같습니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는 논리입니다. 직급이나 나이가 많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최소한의 선은 지키니까요. 이마저도 소용없을 때도 있지만 말이죠.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고충은 정말 심합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했다고, 꼭 있어야 하는 사람이 공동체를 떠나기도 합니다. 정말 안타까운 거죠. 직접 연관되어 있다면 손이라도 써보겠는데, 그렇지 않을 때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마음이 쓰라립니다.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아쉽습니다.
썩은 사과가 떠오릅니다.
바구니에 썩은 사과가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빼내야 합니다. 그대로 두면 멀쩡한 사과마저 썩게 됩니다. 전염병처럼 옮게 되는 거죠. 모든 사과를 신선하게 먹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상태를 자주 살피고, 썩은 사과 혹은 그럴 기미가 보이는 사과는 빼내는 겁니다. 잘 살피지 않고 썩은 사과가 있음에도 그냥 두면, 다른 사과들도 썩게 됩니다. 우물쭈물하는 순간에 모든 사과가 다 썩을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썩은 사과처럼, 타인을 썩은 사과로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과 행동으로 상처 주고 힘들게 하는 거죠. 왜 그러는지 안타까울 때가 있지만, 할 수 있다면 빼내야 합니다. 온전한 상태로 회복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빼내야 합니다. 온전한 사과들을 보호해야 하니까요. 썩은 사과를 방치했다가, 온전한 사과가 썩어서 나가떨어지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야 합니다. 내가 썩은 사과와 같은 말과 행동을 하진 않는지 말이죠. 수시로 살펴봐야 합니다.
진상 불편의 법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모든 공동체에는 진상이 있다는 겁니다. 혹시 진상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자기를 계속 살펴야 한다는 걸 알려줍니다. 누군가에게 손가락질하면, 나머지 세 손가락은 자기를 향한다고 하죠? 공동체에 속해 있다면,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그것이 곧 공동체를 유지하는 힘이 되고, 본인에게도 도움이 되는 방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