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이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 비둘기 Mar 19. 2016

소녀의 미소

지하철에서

빠알간 유모차 안에 한 소녀가 보라색 우산을 쓰고 앉아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감시로부터, 세상의 온갖 소란으로부터 한 발 멀어지듯, 우산의 그늘 아래 있었다. 그녀는 세상을, 정확히 말하자면 지하철 안을, 살짝 찌푸린 염세적인(그 어린 나이임에도 분명 엄청난 불만이 가득했다) 눈빛으로 둘러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묘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나도 약간은 염세적이었던 탓이려나-. 그래서 나는 그녀를 계속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불만 가득한 눈빛도 어느 순간 나를 향했다. 

 우산에 가려 부모도 아이가 어디를 보는지 모르고, 다른 사람들은 나와 그녀에게 관심이 없으니, 우리 둘만의 은밀한 시선 교류가 우산 밑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여전히 찌푸린 채 나를 바라보았다. 지하철 안의 그 어느 색과도 별 다를게 없는 회색 티를 입고 있던 나를.

 나는 나도 그랬고, 그러고 있으면서도, 왜 얼굴을 찌푸리고 세상을 보고 있느냐는 의미로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 어린아이와 시선 하나 만으로 교감을 했던 것일까? 계속 굳어있던 표정과 닫혀있던 마음을 내 표정이 열었던 것일까?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열고 그 열린 마음을 보이며, 내 마음도 열렸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눈썹으로. 나를 보던 그녀의 눈썹이 쓱-하고 올라갔다. 놓치면 다시 오지 않을 기회임을 느낀 나도 따라 눈썹을 올렸다. 단순히 귀여운 아이와 눈 장난을 하는 게 아니라 뭔가를 아는 이들 간의 눈으로 하는 대화 같았다. 그러기를 세 번쯤, 그녀가 웃었다. 인상을 쓰던 걸 멈추고 웃는 그녀의 표정은 정말 명작 영화 한 편 이상의 감동이었다. 지하철의 모든 잿빛을 덮어버릴 만한 작은 미소. 시멘트 벽을 뚫고 빼꼼 나온 풀의 작은 꽃망울, 잊을 수 없으리라-

 그때 부모가 일어나서 유모차를 돌려 내릴 준비를 했다. 위치 관계가 바뀌자 그녀는 우산 아래로 고개를 숙이며 나를 바라보고, 유모차가 돌아가자 다시 고개를 돌려 한쪽 눈으로 나를 계속 보았다. 

이미 둘의 마음의 끈이 닿아있었고, 

그녀가 언젠가 이 순간을 기억하기를 바랐고, 

살다가 언젠가 우연히라도 다시 마주치기를 바랐고, 

고개를 돌려 보이던 한쪽 눈이 해맑게 웃는 것을 보며 

어쩌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스크린 도어가 닫혔다.


우리의 짧은 교감이 그녀를 밝은 길로 인도하여 주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갈 수 있으면 갈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