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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h on Sep 20. 2021

야간 자율학습을 해냈듯이

모든 처음에 대하여

있잖아, 처음 고등학교 야간 자율학습을 하던 날. 이건 말도 안 되게 힘들다고 느꼈어.


우선 세 시간을 내리 앉아있을 만큼 진득한 기질은 나에게 없었고, 다들 뭔가 열심히 풀고 있는데 나는 뭘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더라고. 우선 그냥 아무 책이나 구해서 읽었는데, 친구들이 열심인 가운데 나만 이 시간에 대해 파악을 못 했던 것 같아.


그다음 날에는 책이 아니라 문제집을 펴서 풀었어. 17살의 나는 아주 살짝 감을 잡았지만, 세 시간을 채울 수 있을 만한 집중력은 아직이었는지 한참 뒤척이고 하품을 하며 힘들어했어.


그즈음의 시기에는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내내, 창밖으로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존경스러워 보이더라고.


'와, 저 사람도 고등학교는 졸업한 나이인 것 같으니 야간 자율학습을 버텼겠지? 적막 속 오롯이 주어진 세 시간을 어떻게든 채웠을 거야.'


이후 꾸역꾸역 적응을 해서 너끈히 야자시간에 익숙해진 나는, 항상 조금 힘든 첫 경험들 마다 이때 버스 창밖을 내다보던 기분이 생각 나.


처음 가족을 잃었을 때, 처음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처음 직장에서 안 좋은 소릴 들었을 때,... 처음으로 겪는 모든 상실과 실패의 순간마다.


나의 처음이 견디기 힘들 때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가까운 사람보다는 내가 모르는 불특정 다수에게 위로를 받아. 다들 내가 허우적댄 물웅덩이를 건너왔을 거고, 아무 일 없는 듯 무표정으로 걸어가는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처음과 전쟁을 하고 있겠지.


역시나 아직 오지 않은 모든 처음은 나를 힘들게 하겠지만 시간을 믿고 나를 믿어보자, 이젠 17살 고등학생이 대단하다고 지켜보던 버스 밖의 사람이 되었으니까. 다가올 처음이 주는 어지러움과 불안을 조금은 즐길 수 있을지도 몰라.





2021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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