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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날엔 Nov 16. 2020

사랑을 하려면 자신부터 사랑해야지

연애 이야기- 꽃신, 나빌레라(5)

우리는 연애 중인 상대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상대의 취향, 취미, 가족관계 등등 상대를 알아가는 과정은 즐겁고 경이롭다. 하지만 연애에 문제가 생기면 그때부터 상대의 단점을 수집하듯 모으기 시작한다. 넌 너무 예민해, 넌 너무 구속해, 넌 너무 이기적이야. 등등. 나 역시 그러했다. 상대의 단점들을 모아 우리 관계의 문제는 상대로부터 시작한다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왜 저 사람과 연애를 하게 되었나 하는 근원적인 의문을 가지게 됐다. 나는 왜? 화살표를 나에게로 돌리자 어느 순간 나의 문제들이 보였다. 그의 문제라 생각하던 많은 부분들이, 내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다. 꾸준히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을 거슬려 하는 나의 원인은 무엇인지 돌아봐야 하는 것이다. 나는 왜 그의 단점들을 못 버텨냈을까. 




나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었다. 나도 깨닫지 못했으니 내 주변 대부분도 아마 이 사실을 알지 못했으리라.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였고, 그런 아버지로부터 나를 지켜주던 어머니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집에는 낮이고 밤이고 술을 마시는 아버지가 있어요"라는 말을 쉽사리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그 문제를 모르는 사람들 틈에 있으면, 잠시라도 그 문제를 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내 이미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싫었다.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이고, 어머니는 돌아가셨대. 이 한 문장으로 내가 설명되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그저 밝은 사람인 체 하고 싶어서, 열심히 숨기려 애를 썼던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는 그 밝음이 자연스런 옷처럼 입혀져 잘 웃고 밝았고 강한 어투로 주장을 하며 '센 척' 했다. 나는 그저 밝고 센 척하는 사람이었다. 결혼을 하고서야 이 부분이 명확하게 보였다. 내 안에는 어둡고 겁많고 다치기 싫어 방어막을 치고 웅크리는 그런 어린 아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술취한 아버지가 화를 내면, 도무지 어떻게 대해야 할 지를 몰라 방에서 자는 척하며 숨죽이고 있던 그 아이가, 어른의 껍질을 쓰고 내 안에 숨어 있었다. 그랬기에 갈등이 생기면 일단 피하는 쪽을 택했다. 상대의 주장이 너무나 이상해도 반박하기보다는 그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온 너가 이상한거야'라는 말을 들으면 옳다고 생각하던 모든 체계가 뿌리부터 흔들렸다. 정말 내가 이상한 걸까?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건가? 그렇게 한발짝 물러나면 그 다음부터는 어떤 주장도 하기 어려워졌다. 


그리고 내가 만난 그 역시, 아마도,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었다. 마음 속의 약함과 부드러움을 억지로 숨기려 했고 논리정연한 자기 주장과 과한 감정 표출로 '강함'을 연출했다. 그리고 본인은 강한 사람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연애 때는 그런 그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싶었다. 욕을 하고, 물건을 던지고, 소리를 질러도 그것을 '치기'라 여겼고 나이가 들면 자연히 사라지는 그런 것이라 혼자 생각했었다. 어린 날의 나 역시 상처받지 않으려 센 척한 적이 있었기에 나만은 그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뜻모를 자신감도 있었다. 좋지 않은 가정 환경에서도 나는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잘 버티고 살아남아 그럭저럭 남들의 궤도를 맞춰 살아내고 있으니 웬만한 시련이 온다해도 잘 버텨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는 스스로의 능력을 과대평가 하고 있었다. 흘러흘러 이룬 지금의 삶에서 더 나빠질 것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는 오만한 확신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두 상처받은 영혼은 사실 늘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으며 연애를 했고 꽤나 자주 길고 험하게 다퉜다. 하지만 그는 입대를 했고 갑작스럽게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게 되자 그 모든 싸움이 추억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저장됐다. 지리멸렬했던 싸움마저 '강렬한 사랑' 탓이라 착각하게 됐고, 사랑과 기억과 그리움이 함께 뒤범벅됐고,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다툼을 그저 사랑의 그림자 정도로 인지하게 됐다.


왜 이렇게 덜컥 결혼을 해버렸을까. 수천번 생각해본 끝에 내린 결론은 수많은 책에서 지적하는 그 문제 '자존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알코올중독자의 딸, 어머니가 없는 아이 등등의 환경에서 어찌저찌 버티고 버텨 잘 살아 남았음에도 그러한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기는 커녕 그 뿌리를 어떻게든 티내지 않으려 애썼다.

결혼식 이후의 삶에 관한 상상이 구체적이지 않았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결혼식, 그리고 혼주의 자리를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결혼식장 혼주의 자리에 앉은 아버지는 과연 술에 취해 있지 않을 것인가. 빈 어머니의 자리에는 누구를 앉혀야 하나 비워야 하나. 어리고 어렸던 나는 거기까지만 상상해보다가 그것을 '내 흠'이라 스스로 생각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멀쩡하고 화목한 가정의 그가 손을 내밀었을 때 그저 꼭 쥐어 버렸던 것 같다. 화목한 가정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이상한 열망이 내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내 결정에 반대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마저 "30살 다 된 너를 받아주는 집이 있을 때 서둘러 시집가라"고 말씀하셨기에 나는 내 나이(... 서른도 안된 그 나이)와 가정환경을 큰 흠이라 여기며 결혼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엄마가 없어서 못 배웠다"거나 "아버지가 똑바르지 못해서 애가 저렇다"거나 하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몹시도 용을 썼다. 문제 있는 가정에서 자란 나는, 어떻게든 화목한 가정을 이뤄 그 일원으로 자리 잡고 싶었다. 결혼 전에는 이런 비뚤어진 욕망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야 '대체 왜 나는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는가'하는 근원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 시작했고, 생각의 끝에 내 안에도 문제가 있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너희 어머니는 너 그러는 거 아시니?"라던 고등학교 선생님의 실언은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 딸이 수업시간에 조는 걸 아시는 지 모르시는 지를 내가 알 턱은 없었지만.. 확실히 깨달은 것은 내 행동이 그릇되면, 돌아가신 분이 바로 소환된다는 사실이었다. 욕 되게 하지 않으리라. 잘 살아보리라. 그런 다짐을 아마도 수천 번은 했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에 갇힌 그러한 다짐들이 삶을 점점 더 이상한 곳으로 몰아가고 있음을,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나는 나를 아껴주었어야 했다. 상대에게 우리는 서로를 존중해야 함을 제대로 인지시켜야 했고, 그렇지 않은 상대라면 과감히 헤어졌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헤어짐이 두려웠고, 화목한 가정을 이뤄 잘 살아내고 싶었으니까.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알아야, 남과의 관계도 '제대로' 굴러가는 것일텐데 나는 그러질 못했던 것 같다. 너 자신을 알라. 테스형의 가르침을 그 때 받아들였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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