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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날엔 Dec 30. 2020

부모님 유산으로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건 고1.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서 어머니는 30만 원을 봉투에 담아 내게 주셨었다. 아무도 모르게 가지고 있다가 꼭 필요한 일에 쓰라고 덧붙이시며. 30만 원, 그 돈은 고등학생에겐 꽤나 큰 액수였고, 함부로 쓰기엔 '무거운' 돈이었다. 그런 돈이 있다. 액수와는 무관하게, 그저 돈으로 바라보기엔 지폐 몇 장에 담긴 기억들이 너무 무거워 절대 함부로 할 수 없는 돈. 그 돈은 말기암으로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를 문병 왔던 이들이 건넨 마음 조각들이었다. 어머니는 그 조각들을 모아 내게 주셨다. 어떤 마음을 담으셨을까. 짐작조차 어렵지만, 그 돈은 내게 너무나 무거웠고 그대로 통장에 넣어놓고는 쓸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당시에는 그런 생각도 했었다.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면, 주식을 열심히 공부해서 이 돈을 큰돈으로 만들고야 말겠다! 20살 대학에 입학해서 '주식의 이해와 실제' 같은 교양수업을 덜컥 수강해 버렸던 것도 어릴 때 가졌던 이 마음이 생각나서였다. 그리고 수강을 마치고 생각했다. 그 돈을 써 버리길 잘했구나. '안 썼다면, 결국 공중으로 사라졌겠구나' 안도했다. 


고2 수학여행. 그즈음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은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다. 아침 점심 저녁 중 깨어 있는 시간과 다시 술을 찾는 시간을 지켜보고 있으면, 요즘 덜하구나 요즘 또 심하구나 하는 느낌을 어느 정도 갖게 되는데, 그즈음의 아버지는 '심각' 상태였다. 수학여행을 위해 입금을 해야 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아버지는 돈을 주시지 않았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 이야기를 해야 기억을 할 텐데, 늘 술에 취해 있으니 말을 해도 까먹고 또 이야기를 해도 까먹는 날들이 이어졌다. 며칠을 지켜보다 잔뜩 약이 올라 "수학여행 입금해야 한다고요!" 소리를 질렀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아버지는 눈을 번쩍 뜨시더니 "여행 같은 걸 가기 전에 인간이 되어야지!"라고 소리를 지르셨다. '인간이 되어야지'라니. 지금까지 뭘 키우셨나요, 태어날 때 저는 무엇이었나요 같은 근원적 질문을 해야 할 타이밍이었지만, 소파에 기댄 채 스르륵 눈을 감아버리시는 아버지를 보며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학교에 있는 동안은 멀쩡하려나 싶어 낮에 전화도 걸어보고, 새벽엔 괜찮으려나 싶어 2~3시에 살펴보기도 했지만, 정말 놀라울 만큼 일관되게, 취해있거나 술을 마시거나 하는 상태였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흘렀다. 


마침내 여행비를 내야 하는 날. 인간이 되지 못한 나는 여행을 가지 말아야 하나 여러 번 고민했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수학여행을 못 가요' 하기가 쪽팔렸다. 친구들은 다 가는 그 여행이 어린 마음에 너무나 가고 싶었고, 결국 은행으로 가 돈을 인출했다. 무거운 돈이 손에 쥐어졌다. 그 돈을 들고 어느 골목으로 숨어들어, 고개를 숙이고 꽤나 서럽게 울어댔다. 얼굴을 들기가 어려웠다. 한참을 울다가 대단한 결심을 했다. 다시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겠다고. 참으로 고2다운 발상이었다. 어쨌든 그 돈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그런 아버지였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겠다는 다짐은 지키지 못했지만, 꽤나 오래 미워하고 피했던 상대. 내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부모'가 되어서도 내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리운 만큼 아버지를 미워했다. 아버지가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놓아버린 그 시간들 때문에 어머니가 스트레스를 받았고, 쌓고 쌓은 화가 결국 암이라는 병이 되어 어머니를 공격했다는 논리로 평생 아버지를 멀리 했다. "만날 술이나 마시고. 우리한테 해준 게 대체 뭔데요"라는 말을 '대놓고' 하는 딸. 그게 나였다. 웃으면서 툭툭, 면전에서 말을 던졌다. 


2020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8살의 나는 유산에 대한 일말의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는데 부조가 부족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혹시나 조금이라도 남는다면 아버지의 마이너스 통장을 해결하고 싶다는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치도 못하게 부조가 많이 들어왔다. 코로나 시국이어서 정말 가까운 지인에게만 연락을 했었는데, 장례비를 전부 제하고도 부조가 남았다. 물론 큰 금액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았다는 것', 전전긍긍하지 않고도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부조를 종잣돈 삼아 작은 투자라도 하면 좋겠다 꿈꾸기도 했었다. 


꿈은 꿈일 뿐이었다. 아버지의 장례를 기점으로 별거 중이던 남편과의 다툼이 극에 달했다. 코로나 시국, 8살 아이를 누가 돌볼 것인가는 늘 싸움의 이유가 됐다. 아버지의 죽음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던 때에 새롭게 벌어지는 싸움들은 감당하기 버거운 것이었다. 살고 싶었다. 행복하지는 않더라도, 단 하루라도 '마음 편하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육아휴직을 질렀다. 혼자 버는 월급으로 전세대출 이자와 카드값, 보험비, 각종 공과금 등을 감당하기에도 빠듯했지만, '일단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휴직계를 내버렸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 성격을. 과연 '믿는 구석'이 없었다면 육아휴직을 지를 수 있었을까. 남겨진 아버지의 부조가 내게 '믿는 구석'이 되어 주었다. 휴직 후 생활비가 부족하면 부조에 손을 대자 하고 결심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부조 역시 마찬가지로 무거운 돈이었지만, 고등학생 때의 그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직접 건네신 돈과 부조로 받은 것의 차이인지 그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어머니가 남겨주신 돈을 쓸 때보다는 '덜 비장하게' 이 돈을 쓰자 결심할 수 있었다. 평생 "아빠한텐 받은 게 없어요" 노래하며 살았는데, 삶의 궁지에 몰려 있던 내게 동아줄이 되어준 건 아버지였다. 좀 더 솔직히, 결정적으로 힘이 된 건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남긴 돈 덕분에 나는 하루하루를 버텨낼 수 있었다. 






어머니가 남겨주신 돈도, 아버지가 남겨주신 돈도 그때그때 참 필요한 도움이 되었다. 두 분은 나에게 이런 일들이 벌어질 걸 예상이나 하셨을까. 그 돈들을 이렇게 쓸 줄 상상이나 하셨을까. 유산이라기엔 거창하지만, 두 분이 안 계셨다면 만질 수도 없었던 돈들이었다. 그 돈을 받아 들고 삶의 순간순간들을 넘겨내고 있는 나. '인생 뭐 이러냐' 하며 내 힘으로 버텨냈다고 생각했지만, 문득 돌아보니 부모님이 남겨주신 것들이 삶의 고비마다 큰 힘을 주고 있었다. 두 분이 '비빌 언덕'이 되어, 나를 품어주고 계셨다.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한다. 나는 꽤 사랑받는 딸이었구나. 훨훨 떠나시면서도 나를 걱정하셨고, 그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내게 전하려 하셨구나 생각하려 애쓴다. 지칠 때마다 우두커니 앉아 그 마음에 집중해보려 노력한다. 남겨주신 돈들을 쓰면서, 죄책감에 시달리곤 했었다. 이 귀한 돈을 이렇게 별 것 아닌 일들에 써도 되나, 고작 내 생활을 지키려 이 돈을 까먹고 있구나 자책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나를 받아들이고 두 분이 나를 품어 주셨듯 스스로를 품어보자 하는 마음을 먹게 된다. 그리고 "사랑받은 만큼 잘 살 테다"하는 다짐도 해본다. 두 분이 남기신 것을 가슴 가득 느끼며, 내 삶의 해피엔딩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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