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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날엔 Dec 30. 2020

(15) 부모님 유산으로 살고 있습니다

부유함과는 아주 거리가 먼, 그냥 생존 이야기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17살.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서 어머니는 30만 원을 봉투에 담아 내게 주셨었다. 아무도 모르게 가지고 있다가 꼭 필요한 일에 쓰라고 덧붙이시며. 30만 원. 그 금액은 고등학생에게는 꽤나 큰 금액이었고, 함부로 쓰기엔 너무나 무거운 돈이었다. 그런 돈이 있다. 액수와는 무관하게, 그저 돈이라고 바라보기엔 그 지폐 몇 장에 담긴 마음들이 너무 무거워 절대 함부로 할 수 없는 돈. 그 돈은 말기암으로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를 문병온 이들이 담아 건넨 마음 조각들이었다. 어머니는 그 돈을 모아 내게 건네셨다. 어떤 마음을 담으셨을까. 지금도 짐작하기조차 어렵지만, 아무튼 내게 그 돈은 너무나 무거웠고 그대로 통장에 넣어놓고는 쓸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생각도 했었다.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면, 주식을 열심히 공부해서! 이 돈으로 주식을 사서! 큰 돈으로 만들고야 말겠다!..... 20살이 되어 '주식의 이해와 실제'(?) 같은 교양수업을 덜컥 수강해버렸던 것도 어릴 때 가졌던 이 마음이 생각나서였다. 그리고 수강을 마치고 생각했다. 그 돈을 써 버리길 잘했구나. 안 썼다면, 결국 공중으로 사라졌겠구나 하고 안도했다. 


고2 수학여행. 그즈음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은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다. 아침 점심 저녁 중 깨어 있는 시간과 다시 술을 찾는 시간을 지켜보고 있으면, 요즘 덜하구나 요즘 또 심하구나 하는 느낌을 어느 정도 갖게 되는데, 그즈음의 아버지 상태는 '심각' 수준이었다. 어쨌든 수학여행을 위해 입금을 해야 하는 그 날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돈을 주시지 않았다. 미칠 노릇이었다. 술에 안 취했을 때 이야기를 해야 기억을 할텐데, 늘 술에 취해 있으니 말을 해도 까먹고 또 이야기를 해도 까먹는 날들이 이어졌다. 며칠을 지켜보다 잔뜩 약이 올라 "아, 수학여행 입금해야 한다고요!" 소리를 질렀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아버지는 눈을 번쩍 뜨시더니 별안간 "여행 같은 걸 가기 전에 인간이 되어야지!"라고 소리를 지르셨다. '인간이 되어야지'라니. 

지금까지 뭘 키우셨나요

태어날 때 저는 무엇이었나요 

같은 근원적 질문을 해야할 타이밍이었지만, 다시 눈을 감고 계신 아버지를 보며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내가 학교에 있는 동안은 멀쩡하려나 싶어 낮에 전화도 걸어보고, 새벽엔 괜찮으려나 싶어 새벽 2~3시에 살펴 보기도 했지만, 정말 놀라울 만큼 일관되게, 취해있거나 술을 마시거나 하는 상태였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흘렀다. 


마침내 여행비를 내야하는 날. 인간이 되지 못한 나는 여행을 가지 말아야 하나 여러 번 고민했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수학여행을 못 가요' 하기가 쪽팔렸다. 그리고 다 가는 그 여행이 어린 마음에 너무나 가고 싶었다. 결국 은행으로 가 통장을 넣고 돈을 인출했다. 무거운 돈이 손에 쥐어졌다. 그 돈을 들고 어느 골목으로 숨어들어, 고개를 숙이고 꽤나 서럽게 울어댔다. 눈물도 꽤나 무거워 고개를 들기도 어려웠다. 한참을 무게들에 짓눌려 울다가 대단한 결심을 했다. 다시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겠다고. 참으로 고2다운 발상이었다. 어쨌든 그 돈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그런 아버지였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겠다는 다짐은 지키지 못했지만, 꽤나 오래 미워하고 피했던 그런 아버지였다. "만날 술이나 마시고. 우리한테 해준 게 대체 뭔데요"라는 말을 면전에서 여러 번 했었다. 웃으면서 툭툭하기도 했었다. 아버지의 오랜 입원에 병원비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와, 내 병원비는 한 번도 내준 적 없을텐데' 같은 생각을 했었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빠와 나는 유산에 대한 일말의 기대조차 없었다. 장례를 치르고 조금이라도 부조가 남아 아버지의 마이너스 통장을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치도 못하게 부조가 많이 들어왔다. 코로나 시국이어서 정말 가까운 지인에게만 연락을 했었는데, 장례비를 전부 제하고도 부조가 남았다. 물론 큰 돈은 아니었다. 다만 '남았다는 것', 돈이 부족해 전전긍긍하지 않고도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남은 부조를 보며 떠올린 것은 '경매'였다. 경매를 통해 이 돈을 불리고 불려 부자가 될테다!하며 야심차게 책도 몇 권 샀지만, 몇 장 넘기다 덮어버리곤 했다. 마찬가지로 꽤나 무거운 돈이었지만, 느낌이 전과는 달랐다. 나이가 들어버려서 인지, 직접 건네신 돈과 부조로 받은 돈의 차이인지, 그 이유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경매책을 몇 장이라도 넘기려 애쓰다 울다 하던 그때 즈음, 남편과의 다툼이 극에 달했다. 아이 양육 문제가 꾸준히 '빌미'가 되었기에 에라이! 몰라! 하며 육아휴직을 '질러' 버렸다. 남편과 별거를 시작한 지도 1년 여. 전세대출 이자와 핸드폰, TV, 인터넷 등을 감당하며 아이를 키우기엔 혼자 버는 월급도 빠듯했다. 육아휴직을 내지 않으면 아이를 맡길 곳이 없었고, 양육을 이유로 남편을 받아들이기엔 내가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질렀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 성격을. 과연 믿는 구석이 없었다면 육아휴직을 지를 수 있었을까. 경매고 뭐고, 아버지도 내가 죽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혼자 판단했다. 그리고 육아휴직 후 생활비가 부족하면 부조에 손을 대자 하고 '결심'을 해 버렸다. 평생 "아빠한텐 받은 게 없어요" 노래하며 살았는데, 막상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힘이 되어준 건 아버지였다. 아니, 좀 더 솔직히, 결정적인 순간에 힘이 되어준 건,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죽음이 남긴 돈 덕분에 나는 내 생활과 아이를 지켰고, 아이가 잠든 틈에 이런 걸 쓸 수도 있게 되었다. 


어머니가 남겨주신 돈도, 아버지가 남겨주신 돈도 그때그때 참 필요한 도움이 되었다. 유산이라기엔 거창하지만, 두 분이 애초에 안 계셨다면 만질 수도 없었던 돈들이었다. 두 분은 나에게 이런 일들이 벌어질 걸 예상이나 하셨을까. 그 돈을 이렇게 쓸 줄 상상이나 하셨을까. 부모님을 모두 보내고 돌아보니, 결국 남는 건 관계에 대한 고찰들이었다. '인생이 뭐 이러냐' 하며 살았지만, 돌아보니 두 분이 남겨주신 것들로 삶의 고비들을 넘기고 있었다.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한다. 나는 꽤나 사랑받는 딸이었구나. 훨훨 떠나셨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그 사랑이 내 곁에 남아 나를 지켜주고 있었구나. 

그 무거운 돈들을 어찌 보면 별 것 아닌 일들에 써 버리고 있지만, 어쩌겠어요. 제가 이렇게 선택한 것을. 이제는 부모님께 기대어 이런 나를 용서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연말이니 한 번쯤 너그럽게 나 자신을 품어주자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사랑받은 만큼 잘 살테다- 하고 다짐해본다. 두 분이 남기신 것을 가득 품고, 내 삶의 해피엔딩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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