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올해도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주시겠지?”
뜨끔했다. 엄마가 주는 선물은 준비했지만, 산타 할아버지용 선물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는 나름의 파티(?)를 했고, 크리스마스 전부터 꾸준히 알려줬기에 미리 준비해서 보내곤 했었다. 초등학교에선 별다른 알림이 없었고, 내가 주는 선물만 준비하곤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주일이 남아 있었기에 '괜찮아, 아직 늦지 않았어'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 아이는, 왜 못 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글쎄, 엄마는 모르지. 못 받을 것 같아? 왜?"
"엄마한테 화 낸 적도 많고, 친구한테도 화 냈었고, 숙제 미룬 적도 많았어."
1년을 돌아보는 걸 보니, 정말 많이 컸구나 새삼스러웠다. '당연히' 받는 것이 아니라 '착한 일을 해야' 주는 조건부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아 신기했다. 아이의 기억 속엔 내가 헐크로 변신했던 순간들이 빼곡했다. 엄마가 변신한 순간들을 '잘못한 일'로 기억하고 있으니, 훈육은 나름 성공적이었던 걸까.
"엄마, 지금부터 열심히 착한 일을 하면 선물 받을 수 있을까? 너무 늦었어?"
"아들, 며칠 바짝 착한 일 한다고 선물을 받을 수 있을 지 엄마는 모르겠어. 근데 아무 것도 안 하고 포기해 버리는 것보다는, 뭐라도 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그치? 알았어."
크리스마스까지 일주일. 그때까진 숙제 시키기가 한결 편해지겠다고 생각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내가 초등학교 1~2학년쯤이었던 어느 날이 떠오른다. 빨래를 너시는 어머니를 따라 옥상에 갔던 나. 그날의 빨랫감 중에는 곰인형 하나가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내가 보물1호로 꼽을 만큼 각별히 아끼던 인형이었다. 유치원 졸업 무렵 난생 처음 가진, 폭신하고 보드라운 곰인형. 당시의 내게 곰인형은 장난감이 아니라 동생이자 친구였다. 서랍 한 쪽에 쌓여 있던 작아진 옷들을 꺼내 계절마다 갈아 입혀주고, 예쁜 머리끈으로 귀도 묶어주고, 레이스가 달린 손수건이 보이면 팔에 칭칭 감아도 줬었다. 녀석을 만난 것은 유치원에서 열렸던 크리스마스 행사.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시던 산타할아버지가 내게 그 인형을 주셨었고, 꽤나 커다란 크기에 주변의 아이들이 '우와' 하며 부러워했었다. 녀석을 볼 때마다 그날의 으쓱대던 기분이 생각나 절로 신이 났었다.
그 귀한 곰인형을 거칠게 잡아올려 빨랫줄에 널고 있는 어머니에게 녀석의 귀함을 알리고 싶었다.
“엄마, 이 곰인형 누가 준 건지 알아?”
“알지.”
“유치원에서 산타할아버지가 주셨어.”
이렇게 좋은 것을, '무려' 산타할아버지에게 받았음을 자랑하고 싶었다. 가족과 친구 모두에게 여러 번 자랑했던 그대로, 어머니에게도 그저 또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어머니의 대답은, 상상도 못했던 진실을 알려줬다. 어렸던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무거웠던 진실.
“에이, 그거 엄마가 사서 갖다 준거야.”
“뭐?”
“몰랐어?”
“....응.”
워낙 어린 시절의 일이라 이 무렵의 일들은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는데, 이날 일만은 크리스마스 즈음이 되면 문득 떠오르곤 했었다. 그만큼 충격을 받았던 걸까. 그때까지, 나는 정말 몰랐었다. 산타 할아버지가 진짜 있는 줄 알았고, 어떤 '마법같은' 힘으로 전 세계에 선물을 할 수 있나 보다 하고 막연하게 상상했을 뿐이었다. 세상이 모두 짜고 어린이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일은,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일기를 쓴다면, '엄마가 너무했다', '세상이 너무했다' 정도로 제목을 붙여도 될 것 같은 날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턴, 해마다 크리스마스 즈음이면 어머니에게 이 이야기를 했었다. "엄마가 동심을 부쉈어"라고 내가 말하면, 어머니는 정색하며 "진짜 모를 줄은 몰랐다"고 얘기했던 기억들. 어머니는 내가 워낙 어른인 척 다 큰 것처럼 말을 해서 그쯤은 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단다. 그리고 어머니는 산타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려던 것도 아니었고, 유치원에서 준 게 아니라 '엄마가 샀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고 여러 번 설명하셨었다.
그럼에도 상처 입은 내 동심은 회복되지 못했다. 그 곰돌이 인형은 그날 이후 특별해 보이지도, 예뻐 보이지도 않았다. 차마 버리지는 못해 대학생 때까지 옷장 한 켠에 뒀다가 취직을 하고 원룸으로 이사를 하면서 아버지 집에 그대로 두고 왔었다.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한바탕 집정리가 이뤄졌고, 나는 결혼을 했고,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집 정리가 진행됐기에 그 어딘가에서 버려졌을 것이라 짐작만 할 뿐이다.
문득 내 아이는 언제쯤 산타의 실체를 알게 될까 궁금해진다. 이 대단한 거짓말에 대해 처음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린 시절 내가 받은 충격을 떠올려 볼 때, 일단 올해까지는(어쩌면 내년까지도) 선물을 준비해서 동심을 지켜주고 싶다.
이런 부모의 마음이 있으니, 세계가 하나 되어 거짓말을 하는 일이 가능한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부모의 마음이 있기에 "어릴 때가 좋은 거다"라는 옛말도 더 힘을 얻게 되는 것 같다. 몸도 마음도 지켜주려는 부모가 있기에, 제 세상인 듯 활개치는 아이들.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를 키우면서도, 나는 가끔 아이들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