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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날엔 Dec 15. 2020

아이도 어른도 좋아하는 그 말 '칭찬'

혼자 블록을 가지고 놀던 아이가 "엄마"하고 불렀다.... 못 들은 척했다. 막 내린 따뜻한 커피가 내 앞에 놓여 있었고, 이 커피잔을 비울 때까지 엉덩이를 뗄 생각이 없었다. 

분명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땐 적극적으로 대답해줬고, 달려갔고,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7~8살쯤 되자, 엄마가 처음인 내게도 기술이란 것이 생겼다. 화장실이면 달려 나왔을 테고, 다쳤다면 울음이 먼저 터졌을 테고, 저토록 차분하게 부르는 건 "엄마, 이리 와 봐"의 줄임말 같은 것이라 예상됐다. 그대로 앉아 있었다. 조금 지나면 완성된 블록 '작품'을 들고 오겠지 생각했다. 5...4...3...2...

"엄마! 이것 봐!"

역시나, 나보다 훨씬 가벼운 아이가 먼저 내게로 다가왔다.

“엄마! 이거 잘 만들었지?”

어려운 문제였다. 블록으로 만든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잘 만들었다고 해줄 텐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레고 덩어리인 그것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 쌓여있는 것인지 잘 보이지가 않았다. 동심은 예전에 사라졌고, 상상력도 부족한 엄마인 나는 "이게 뭔데?"라고 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다.


“좀비야, 좀비. 살아있는 것 같지?”라고 친절히 알려주는 아들.

'많고 많은 세상 아름다운 것들을 다 놔두고 하필 좀비를 만들었구나' 생각했지만, 조금은 기술이 생긴 나는 영혼 1그램 담지 않고 말했다.

“어어, 좀비가 막~~ 살아 움직이는 것 같네.”

육아의 세계에 답은 정해져 있었다. 어설프게 본 육아서들에서 공통적으로 하는 그 말. 칭찬을 해야 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고 아이도 춤추게 한다. 조금 더 영혼을 담으면 좋았겠지만, 나는 지쳐있었다. 유독 피곤한 날이었고, 조금은 더 혼자 있고 싶었기에 “근데 좀비 눈이 어디 있는 거야? 눈이 있으면 더 무서울 것 같아”하고 넌지시 알려줬다.

아이는 “여기가 눈이야"하며 가리키다가, “까만색으로 바꿔 봐야겠다”며 블록 박스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만세. 작전 성공. 돌아오기 전까지 커피를 모두 마시리라 생각했다. 




평생 술을 마시다 끊다 하던 아버지는, 아이가 태어나고 두 살쯤 되었을 때 "정말로 술을 끊겠다" 선언하셨다. 아버지의 단주 선언은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단주를 하다가 '한두 잔은 괜찮지. 이제 조절할 수 있어'하며 다시 술을 드시고, 그러다 보면 술에 취해 출근을 못하는 일이 잦아졌다. 출근을 하다가 못하다가를 반복하다 스르륵 직장을 그만두고 또 낮밤도 없이 마시는 패턴으로 복귀. 평생 봐온 모습이라 별 기대도 없었다. 얼마 쉬시다가 또다시 시작하시겠지,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직접 정신과를 찾아가시고 항갈망제와 수면제 등을 드시면서, 세 달 여섯 달 단주 기간이 조금씩 길어졌다. 


당시 아버지를 담당했던 알코올중독센터 상담사와 통화도 여러 번 했었다. 그분은 "혼자 사시면서 지켜보는 눈도 없는데, 자의로 술을 안 드시는 건 엄청난 의지가 있으신 거다. 얼마나 어려운 일을 해내고 계시는지 꾸준히 말씀드리고 칭찬을 해 드려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잘 알아 들었다. 다짐도 했다. '와, 이번엔 진짜 오래가는데' 생각하고 있었기에, 전문가님이 알려주신 대로 아버지에게 힘이 되어 드리리라 마음도 먹었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전화가 걸려오면 '술' 생각이 먼저 났다. 밤이고 낮이고 한결같이 의심했다. 낮에 통화를 하면 "어제 술 드신 거 아니죠?", 밤에 통화를 하면 "이제 술 드실 거 아니죠?" 의심하기 바빴다. 그리고 늘 잔소리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아빠, 술 더 마시면 죽어요. 진짜 절대 드시지 마요."

머리로만 다짐했던 칭찬들은, 의심과 잔소리 사이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했다. 다음에는 꼭 칭찬을 해드려야지, 전화를 끊으며 또 다짐만 했다. 


단주가 한창이던 때, 아이를 데리고 아버지 댁을 찾은 적이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신 아버지가, 뜬금없이 손에 책 몇 권을 들고 나오셨다. 아버지는 "요즘 읽는 책"이라며 내 앞에 3~4권의 책을 턱 하니 내려놓으셨고, "너도 한 번 읽어봐라" 말씀하셨다. 갑자기 책이라니? 아버지와 책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조합이었다. 아이가 갓 걸어 다닐 때라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아버지는 책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하셨다. 이 책은 이런 내용이고, 저 책은 저런 내용이고... 쓱 훑어보니 건강과 신앙에 대한 책들이었다. 과연 내용을 다 읽긴 했을까 생각했고, '그깟' 책 몇 권 읽고 되게 자랑한다고 생각했다. "너 안 읽어봤지? 꼭 읽어봐라" 말씀하시는 아버지 앞에서 나는 웃었다.

"전 원래 책 많이 읽어요. 아빠는 왜 안 하던 걸 하시고 그래요. 괜히 눈 버릴 수 있으니까 밝은 데서 쉬엄쉬엄 보세요."

아이에게 말하듯, 영혼 없이 대답했다. '아버지가 권하는 책 같은 건 저랑 안 맞아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의도가 들릴 만한 말투였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더 이상 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셨다.






칭찬을 대놓고 '요구'하는 아이를 보면, 그 무렵의 아버지가 문득 떠오른다. 나이가 들면 아이가 된다던데, 아버지도 아이 같은 마음을 갖고 내게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나 진짜 술 안 마신다", "나 책도 읽는다" 말하며 "잘했지? 잘했지?" 하고 싶으신 그런 마음. 아버지를 미워하던 어릴 때의 마음을 그대로 품고 있던 나는, 그런 아버지가 낯설기만 했었다. 고작 몇 달 술 끊고는 왜 자랑을 해요, 고작 몇 권 읽고는 웬 자랑이에요 라고 생각했었다. 아버지는 그때 술을 끊으시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술을 입에도 대지 않으셨다. 마지막 몇 년은 병원생활을 하셨기에 드시고 싶어도 못 드셨겠지만, 어쨌거나 일평생 단주 약속을 지켜내셨다. "술 더 마시면 죽어요" 악담이나 했던 딸은,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견디셨을지 상상도 해보지 못했었다. 수십 년 습관을 단번에 끊어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지, 이제야 더듬더듬 가늠해본다. 아버지의 굳었던 의지를 이제야 짐작해 본다. 


"어우, 잘했네요", "와, 대단해요" 칭찬 비슷한 말이라도 해 드렸으면 좋았을 걸. 나는 단 한 번도 "아빠, 잘했어요" 이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명절이나 생신 등에 봉투 하나 드리면서는 온갖 칭찬을 바랐다. 

"아빠, 이런 딸이 없죠? 최고죠?" 

내가 이렇게 물으면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그래, 최고다."

정작 아버지가 바란 것은 돈이 든 봉투 같은 게 아니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아니, 당시에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모른 척 했다가 이제야 후회한다. 깊이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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