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에 다니던 아이가 하원 후 가방을 벗지도 않고 진지하게 물었던 적이 있다.
“엄마, 엄마는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고. 아무도 없어?”
당황했다. '어른의 세계'에서는 아무도 내게 직접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질문이었기에 무엇이라 답해야 할 지 잠시 생각했다. 과한 슬픔도 아이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았고,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고 답하기도 어려웠다. 일단 대답은 보류. 무엇이 아이에게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는지를 알고 싶었다. 유치원에서 배운 주제가 '가족'이 아니었을까 짐작했다.
"오늘 뭐 배웠는데?" 물었다. 역시나. "할아버지랑 할머니,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 이모, 고모..." 라는 대답이 이어졌다. 아이가 다시 나를 보며 질문했다.
"할아버지랑 할머니는 있는데,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는 없는 거야?"
"응, 없어. 사실 엄마는 알에서 태어났어!"
"............."
빤히 나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을 모른 체 하기는 어려웠다. 진지한 질문이었으므로, 진지하게 답해야 했다. 우선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해 설명했다. 어떻게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까. 종교와 과학, 어느 쪽 편을 들어 설명해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지만, '육체의 생명력이 다해 돌아가셨지. 사라졌어. 끝!'보다는 '하늘나라로 가셨어' 하는 편이 다정할 것 같았다.
“사실 엄마의 엄마는, 그러니까 외할머니는, 엄마가 17살 때 아파서 돌아가셨어. 하늘나라에 계시지.”
"그럼 우리는, 못 만나?"
"음, 하늘나라에 계시니까 나중에 나~중에 엄마도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만나겠지."
“그럼 엄마의 아빠는?”
“병원 할아버지 알지? 그 할아버지가 엄마의 아빠야. 외할아버지지.”
아버지는 아이가 3살 무렵일 때부터 알코올성 뇌손상으로 병원에 입원해 계신 상황이었다. 짧을 줄 알았던 입원은 수년간 이어졌고, 아이의 인생에서 내 아버지는 '병원 할아버지'로 불렸다. 매주말 문병을 갔음에도 아이는 병원에 계신 분이 누구인지조차 잘 인지하지 못했다. 이런 저런 대화 속에서 '친할아버지'와 구분 짓기 위해 편의상 '병원 할아버지'로 부르기 시작했는데, '편의상 호칭'이 굳어진 것이었다. 자라나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상황과 관계를 설명해야 했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소홀히 했었다.
"아..... 살아있는 거네."
살아있어서 만날 수 있는 외할아버지와 돌아가셔서 못 만나는 외할머니. 아이의 이분법은 놀랍도록 선명했다. 죽으면 못 만나는 것. 살아있으면 만날 수 있는 것. 죽음에 대해 조기교육을 한 느낌이었다.
'살아있는' 병원 할아버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아이가 물었다.
"엄마, 근데 병원 할아버지는 집이 없는 거야? 왜 만날 병원에 있어?"
입원 전 기억이 나도 가물가물한데, 아이가 아버지의 집을 기억할 리 없었다.
"너 더 어릴 땐 외할아버지집에 갔었어. 지금은 할아버지가 아프시니까 병원에 계시지. 혼자 못 걸으셔."
"그럼 똥은 어떡해?"
한참을 아무 말이 없던 아이가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갑자기 웬 똥. 아이의 침묵에 따라 생각에 잠겼던 나도, 아이의 사고를 따라 가느라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에게 '혼자 못 걷는다'는 문제는 바로 화장실로 연결되는 것임을.
"침대에 누워서 기저귀에 하지. 아기들처럼 기저귀를 갈아드리는 거야."
"그럼, 잠은 어디서 자?"
"침대에서 주무시지."
"밥은?"
"침대에서...."
"그럼, 침대에서 똥도 싸고 잠도 자고 밥도 먹고 하는거야?"
"응.”
“우웩-"
아이 덕분에 새삼 아버지의 '처지'에 대해 생각해봤다. 좁디 좁은 병원 침대에서 똥도 싸고 잠도 자고 밥도 먹는 생활을 하고 계시는 아버지. 술에 원수를 진 사람처럼, 세상 술을 모두 없애 버리겠다는 듯 매일매일 드시더니, 결국 술에 잡아먹힌 건 아버지였다. 입원 후 아버지의 몸은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 빠른 속도로 제 기능을 잃어갔다. 이 어린 아이의 눈에도 ‘우웩’하는 생활을 하는 아버지. 어떻게든 해결해 보고 싶었지만, 어디서 방법을 찾아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는 어렸기에 내 손이 필요했고, 다니는 직장을 그만둘 수도 없었고, 야근과 주말출근이 이어지는 생활 속에서 쳇바퀴 뛰느라, 그 옆에 계신 아버지를 돌아보기가 너무나 버거웠다.
아버지의 장례식.
8살이 된 아이 인생 첫 장례식이자 내게는 두 번째인 부모님 장례식. 아이는 장례식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고, 나는 무너지는 마음을 잡기에도 버거운 시간을 버텨내고 있었다. 장례식장에 도착한 아이는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내게 물었다.
“누구야?”
병원에 계시던 아버지는 갈수록 야위어 갔기에, 입원도 하기 전에 찍은 영정사진 속 모습이 아이에게는 낯선 것이 당연했다. 아예 모르는 사람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외할아버지 장례식이라고 얘기했잖아. 외할아버지지."
"그럼 병원 할아버지는?"
“그 병원 할아버지가 외할아버지고, 저 사진 속 사람이 병원 할아버지야. 돌아가신거야.”
“그럼, 이제 못 만나?”
무섭도록 선명한 아이의 이분법. 핵심을 정확하게 파고드는 그 질문에 바로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목이 매였다. 코로나로 문병이 금지됐고, 얼굴을 못 뵌 지도 5개월이 흐른 시점. 아버지는 그 시간을 혼자 누워만 지내시다 그대로 떠나버리셨다. 임종은 당연히 보지도 못했고, 몇 개월 만에 아버지 얼굴을 직접 뵌 것은 입관을 거행하면서였다.
그래. 못 만난다. 지금껏 못 만났고, 이제 앞으로도 영원히 못 만난다.
"응, 못 만나. 아들. 우리는 이제 외할아버지를 영영 못 만나."
목소리가 떨려 물을 벌컥벌컥 마실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질문은 이어졌다.
“엄마, 엄마는 언제 죽어?”
“글쎄...”
“나 어른 될 때까지는 안 죽지? 죽으면 안돼.”
“.......”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응, 엄마는 너 어른 될 때까지 안 죽지"하고 말하면 되는 건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내 기억 곳곳에 부모님의 모습이 있듯, 지금의 이 약속이 아이 기억에 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함부로 말하기가 어려웠다. 혹시나, 만약에, 못 지킬 수도 있는 약속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