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너를 위하여 [1부 12월 12일 : 실패하다]
깊은 밤,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버스에 고단한 몸을 실었다. 잠시 후 중년의 사내가 곁에 앉는다. 누군가와 연신 통화를 한다. 상대에게 사정을 하다, 화를 내다, 곡을 하다가… 돈에 관한 일인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는 한숨을 내쉰다. 그 탄식의 꼬리가 몇백 년은 묵혀둔 것처럼 길고 길었다. 곧 다시 벨이 울리고, 발신자를 확인하는 사내의 손이 주춤한다. 아들이었다. 자식과 이런저런 근황을 주고받다, 말미에 누차 당부한다.
「꼭 사. 공부하는데 책이 없으면 쓰나. 얼마노, 바로 보내줄게.」
익숙한 문장이었다. 듣기 싫은, 질척한.
애써 외면하고 싶은 마음에 고개를 돌려 바깥을 응시했다. 어둠에 묻혀 거울이 된 차창은 사내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제 사람에게조차 토로할 수 없는 삶의 무게가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내와 같은 표정, 같은 꼴을 하고 앉아 나를 바라보는 이가 더 있었다. 익숙한 생김새가… 어디서 본 듯도 한데.
image_©Lesley Oldaker
그러나 서울은 좋은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분노를 가르쳐주니까요. 덕분에 저는 도둑질말고는 다 해보았답니다. 조치원까지 사내는 말이 없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마지막 귀향은 이것이 몇 번째일까. 나는 고개를 흔든다. 나의 졸음은 질 나쁜 성냥처럼 금방 꺼져버린다. 설령 사내를 며칠 후 서울 어느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한들 어떠랴. 누구나 겨울을 위하여 한 개쯤의 외투는 갖고 있는 것.
_기형도 <鳥致院> 《입 속의 검은 잎》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