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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Nov 10. 2020

12. 향수병

나의 향수를 알아채는 일


| 향수를 알아채는 일


외국에 사는 한국인이라면 응당 한 번씩은 걸리는 병이 있다. 바로 향수병. 한국을 가야 치료가 되는 이 병은 나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뉴질랜드에 살면서, 한국을 잊고 산다고 생각했다. 아니 잠시 잊고 싶었던 거 같다.      

요즘 들어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다.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번아웃 이라고 하기엔 거창하고 일종의 권태기 정도 되겠다. 


특별한 비극은 없다. 일상의 반복과 사람들을 만날 때 바꿔 낄 수 있는 가면의 무게 정도만 참으면 더할 나위 없는 무난한 날들의 연속이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은 고양이 같은 놈인데 이놈을 내가 한국에 두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 커피의 잔향이 옷에 남는다는 것


바리스타로 일하던 시절, 아침 먹을 시간도 없이 부랴부랴 오픈 준비를 시작하곤 했다. 곤히 잠들어 있는 이 어둠 속에서, 부스럭거리며 옷을 주워 입고 바쁘게 길을 나선다. 생각보다 뉴질랜드의 아침은 빠르다. 

한국과 다르지 않게 출근 버스에는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카페에 들어오면 진한 커피 향이 코를 간지럽힌다. 내가 일하던 카페는 집에서 가까워 걸어서 10분 정도 소요되었는데, 늦잠을 자는 날에는 씻지도 않고 급하게 뛰어나가기 바빴다. 고소한 원두의 향으로 비몽 사몽 아침잠을 깨웠다. 맞은편 카페 바리스타와 눈인사를 나누며 오늘 하루를 응원한다.


문이 열리네요. 손님이 들어오죠. 첫눈에 그대가 너무나 피곤해 보이는 걸 알았죠. 


그녀는 플랫화이트 한 잔을 주문했다. 커피 한 잔에 오늘의 격려 두 어 스푼을 넣으니 컵이 넘칠 것 같다. 오늘 하루도 파이팅이다. 첫 번째 손님이 다녀간 이후로, 끊이지 않는 커피 주문으로 인해 유니폼을 벗어도 온몸에서 커피향이 나는 것 같다.     




| 문득 익숙한 향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나는 내 몸에서 나는 커피향이 좋았다. 그 날도 커피향으로 가득한 나날 중 하루였다. 항상 끼니를 제때 안 챙겨먹고, 매일을 버텨내니 몸이 조금씩 고장 나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건강한 사람이니까 괜찮아. 그렇게 여러 날이 흐르고,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한국에서 한 번씩 고장 났던 부분이 다시 재 고장이 났다.     


‘한국에서는 밥도 잘 챙겨 먹었는데’, ‘한국에서는 병원 가면 금방 치료될텐데’, ‘한국에서는, 한국에서는’ 머릿속으로 무한 재생. 어린아이가 엄마한테 떼쓰듯이, 나도 모르게 떼를 쓰고 있었다. 


떼를 쓰는 날들이 늘어나면서, 무의식 속에 있던 한국에 대한 갈증이 나도 모르게 밖으로 나와버렸다. 떠나와서 생각이 안 날 줄 알았는데, 어느새 너무나 그리운 존재가 되었다.     


3개월간의 바리스타 생활을 마치고 그래픽 디자이너로 취업하게 되면서 운 좋게 워크 비자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워크 비자를 받게 되면 워홀 기간이 끝난 후에도 1년 동안 체류가 가능하다. 

그때는 왜 그렇게 망설였을까 


무엇이 나를 그렇게 갈등 되게 했을까 나는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 살면서 많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데 어떤 선택을 하든 항상 후회와 미련은 남기 마련이다. 마음이 많은 고민 들로 가득 찼다. 하지만 나는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언젠가 이 선택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분명히 후회할 거다.

하지만 이 향수병의 잔향이 계속해서 코끝을 간지럽혀서 견딜 수가 없다.


스물 아홉의 내가 스물 여덟의 나에게 질책을 할 수도 있다. 외국 생활을 했다고 해서 크나큰 깨달음을 얻지는 않았다. 다만 모든 것에는 제자리가 있는가 보다. 그로 인한 일상의 소중함과 떠나보면 알게 되는 것들을 가지고 다시 돌아갈 예정이다. 방구석이 전부였던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평생을 살며 곱씹을 추억거리들이 생긴 건 확실하다. 


익숙한 것들이 좋고, 집이 좋은 집순이는 역시 낯선 이국땅보다 지겹도록 편안한 이곳이 좋은가 보다.     



그렇게 향수병은 치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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