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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Nov 04. 2020

04. 도피처


“짹짹”, “깍깍”     


또 시작이다. 새벽 6시면 울려대는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내가 일어나도 절대 꺼지지 않는 이 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내 방 바로 옆 나무에 자리 잡은 참새들. 벌써 한 달째다.

지치지도 않고 울어대는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참 부지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 나는 집 근처 산책로를 수십 번은 더 가고, 내가 가는 버스 노선도도 얼추 눈에 익혔다. 이제는 우리 동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익숙함도 어느 정도 생겼다.     

홈스테이 집으로 들어오던 첫날,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나의 한 달 생존을 도와주실 분들은 필리핀 출신이며 현재 뉴질랜드 이민을 준비 중이라고 하셨다. 사실 유학원에서 이미 정보를 다 알려준 터라 다 알고 있지만,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는 마냥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Hi, I’m from South korea and I’m here for working holiday”

(안녕, 나는 한국에서 이곳에 워킹홀리데이를 하러 왔어, 잘 부탁해)     

“Oh, cool! You can call me Chec”

(편하게 Chec이라고 부르면 돼)     


다분히 형식적이며 그 누구의 인상에도 깊게 남지 않을 인사를 하며 함께 처음을 주고받았다. 그 자리에서 어떤 이야기가 더 오고 갔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처음으로 마주했던 내 방의 기억으로 생생하다. 이불에선 방금 빤듯한 섬유유연제 향이 가득하고, 침대 바로 옆 창문에는 은은하게 초록빛이 스며들었다.


이 정도면 한 달이 아니라 일 년 동안 쭉 살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도나도 비집고 들어오는 풀 냄새로 막힌 코가 뻥 뚫리는 기분이다. 1년의 무게를 책임져줄 내 몸뚱아리 만한 짐을 풀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한다. 지금 내가 두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이 한국이 아니라니 스스로의 감상에 젖어 있던 찰나 나의 밥 탐지 센서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킁킁. 익숙한 돼지갈비 냄새가 난다. 밥 먹을 시간이 되었나 보다. 뭐든 처음이 설렌다는데 매일 먹는 끼니일지언정 그마저도 설렜다.


 뉴질랜드의 첫 끼는 감동적이었고, 심히 따뜻했다. 눅진한 돼지갈비의 양념을 한 숟갈 뜨니 여기가 한국인가 뉴질랜드인가 싶다. 술 한 모금 하지 않았지만, 취기가 오른 듯 구구절절 내뱉는 아무 말로 식탁의 공기를 가득 채워갔다. 하지만 하루 권장 영어 사용량을 초과한 나는 그 날 밤 기절했다.


눈을 떠보니 어느덧 달이 지고 해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모자에 머리를 대충 구겨 넣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왔다. 이 정도면 동네 패션 완성이다. 침대에 한참을 누워있다가 동네 구경을 해 보기로 했다. 막상 나와보니 평화롭다는 단어를 이럴 때 쓰는 건가 싶다. 범죄자는 아니지만 죄짓고 이곳에 오면 용서받는 기분이 들 정도다. 본인은 선량한 시민이다. 걱정마시라     

‘와 너무 조용하다 여기’     


터벅터벅 발걸음 소리만이 거리의 적막을 가득 채웠다. 너무나 평화로운 이곳의 공기는 나의 마음을 정화해주는 데 충분했고 도피처로 선택한 내 첫 번째 퍼즐이 맞게 끼워진 것 같아 안심했다. 어느덧 햇살도 퇴근할 시간이다. 나무 위에서 목청껏 노래를 부르던 녀석들도 이제는 조용하다. 오늘은 야근 없이 정시퇴근 했나 보다. 나도 이제 돌아가야겠다.   

  

‘야옹’


나무 밑에 벌러덩 누워서 유혹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녀석이 있다. 너무나 치명적인 이 녀석을 어찌 거부할 수 있으랴. 철푸덕 자리를 깔고 앉아 녀석의 배를 살살 문질러댔다. 기분이 좋은지 연신 꼬리를 흔든다. 나도 집으로 퇴근해야 하는데 녀석의 욕심은 끝이 없다. 이제 손이 조금씩 저려온다. 세상 편하게 누워있는 놈을 보자니, 나도 괜스레 침대에 눕고 싶어진다. 얼른 들어가야지. 내일을 약속하고 오늘은 이만 헤어지기로 했다. 집에 돌아오니 어느새 Chec과 Teddy가 와 있다. 오늘 동네 구경했다고 오는 길에 고양이도 봤다고 자랑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참새처럼 짹짹대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었다. 오늘 저녁에는 무슨 얘기로 식탁이 채워질까 궁금해진다. 급하게 도피해온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만하면 성공인가.


늘 도망만 다니던 내가 마음 놓고 숨어 살 곳이 생겼다.      


‘한 달 동안 잘 숨겨줘, 내 도피처’      

도망 전문가는 그렇게 새로운 도피처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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