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하면 삶이 달라질 줄 알았지(1)

퇴사 후, 방향을 잃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

by 써니

퇴사하고 나서 가장 자주 들었던 말은
“그래서 이제 뭐 할 거야?”였다.

그 질문에 나는 늘 조금 늦게 대답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대답하지 못했다.
하고 싶은 건 많은데, 그게 정확히 뭐냐고 묻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AI 강의도 했고, 공간도 운영했고, 크고 작은 프로젝트도 여럿 진행했다.
겉으로 보면 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하나로 이어진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최근에 컨설팅을 하나 받았다. 나도 어쩌면 알고 있는 대답이자, 누군가에게 무조건 들었어야 할 말이었다.
“하시는 건 많은데, 하나의 브랜드로는 잘 보이지 않아요.”

그 말을 듣고 나서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반박하고 싶은 마음도, 억울한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냥 ‘아, 그렇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나조차도 내가 뭘 하고 있는 사람인지 설명하기 어려웠으니까.


생각해보면 퇴사 후의 나는 무언가를 결정하기보다는 무언가를 시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었다.
이게 맞는지 모르겠어서 일단 해보고, 확신이 없으니까 다음 걸 또 해보고.
그러다 보니 점점 이런 질문이 따라붙었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이 많은 것들 중에, 나다운 건 뭐지?’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다음 일정으로 넘어가는 날들이 반복됐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나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계속 밖으로만 움직이느라, 정작 내 안에서 어떤 생각이 쌓이고 있는지는 거의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느낌.


그래서 기록을 다시 시작했다.그다지 대단한 다짐은 아니었다. 오늘 뭘 했는지, 뭘 하다 말았는지,
어떤 말에 기분이 좋았고, 어떤 순간에 괜히 피로해졌는지. 정리되지 않은 상태 그대로 적었다.

신기하게도 기록을 하다 보니
‘뭘 해야 할지’보다 ‘뭘 하고 싶지 않은지’가 먼저 보이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에너지가 빠지는 일, 괜히 나를 작게 만드는 방식, 억지로 흉내 내고 있던 태도들.

기록은 답을 주지 않았지만 방향은 조금씩 보여주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보다 혼자 오래 앉아 있는 걸 좋아했고,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을 유심히 듣는 걸 좋아했고, ‘결과’ 못지 않게 ‘과정’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걸 깨닫는 데 새로운 프로젝트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기록이면 충분했다.

요즘 나는 ‘이걸 해야겠다’는 결론보다 ‘아,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라는 문장에 눈이 더 머무른다.
그 문장들이 쌓이다 보니, 조금씩 하나의 방향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실 아직도 나는 뭘 해야 할지 완벽히 알지는 못한다.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모른다는 사실이 예전만큼 불안하지 않다는 것.

기록을 하면 적어도 나를 놓치지는 않게 된다.
흩어지는 생각들 사이에서 “이건 나야”라고 말할 수 있는 단서가 남는다.


퇴사 후에 방향을 잃은 사람에게 거창한 조언을 해주고 싶진 않다.
다만 이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일단 기록해보자.

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나는 완성되지 않은 문장 몇 줄을 적는다. 그게 지금의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방법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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