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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학대식 Jul 23. 2019

눈에 띄는 뉴스

공유경제를 이용할 준비가 되었는가 ?

전 세계 경제에 가장 큰 화두 중 하나인 [공유경제]라는 컨셉을 문제없이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가치가 있다. 그리고 이 가치는 어느 누군가에게는 제법 지키기 어려운 기준으로 느껴질 수 있겠다. (그러니 이 가치를 지키기 어려운 사람은 과감히 공유경제의 시스템에서 하차하자! 가 이글의 끝이다. 혹 이 문장에 쉽게 공감이 되는 분들은 뒷부분을 읽지 않으셔도 된다) 혼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기본적인 요구겠지만 하나가 아닌 집단이 되어 게다가 이것이 내 것이 아닌 일종의 공공의 재화를 이용하는데 필요한 요구라는 것을 인지한 순간 갑자기 높은 기준으로 변한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한 가지 재화를 여러 사람이 나누어 쓴다는 것, 곧 재화를 공유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부분에서 메리트가 상당하다. 어찌 되었건 내가 부담해야 할 금액의 파이가 확연히 작아지기 마련이니 만약 높은 절대가로 인해 구매를 고민했다면 더더욱이나 그러하겠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매력적인 공유라는 소비활동을 결정하며 마땅히 짊어져야 할 책임이나 예의 또 이로 기인할 수 있는 부작용 등은 신경 쓰지 않는다. 안타깝지만 우리들은 누군가와 무엇을 나누는 것에 대해, 즉 공공재에 대한 의무나 책임은 한 번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기에 그렇다.


해외를 나가보면 유명하다는 장소에서는 어디든 한국어로 낙서가 되어있다. 적당히(?) 마커나 볼펜으로 한 낙서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시내 유명 전망대 한쪽 편에 깊게 새겨진 한국어와 심지어 가끔은 식물에 자신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남겨 그것의 성장과 더불어 자신의 이름 역시 같이 커지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형제, 자매들의 행동의 잔재들을 찾아보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쓰이거나 깊게 파인 낙서가 아예 존재하지 않아, 찾을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지극히 익숙한 한글만 유독 눈에 띄는 것 일수도 있는 노릇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언어로 작성이 되었던 자신이 드나든 흔적을 남기고자하는 인간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게다가 너무 눈에 띄는 한국어 덕에 본인은 여러 번 창피함을 느꼈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 사실이다. 어쩌면 우리는 공공재나 공공장소라는, 이른바 함께 이용할 수는 있으나 어느 개인이 완벽히 소유할 수 없는 무엇을 삶에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 않기에 또 그런 것을 이용하는 공유의 문화와 경험이 짧다는 것을 말미암아 이러한 문제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


반상제의 붕괴이래 자신의 것을 소유하는 것에 엄청나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허물어진 시스템에의 반작용쯤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런데 유독 우리 한국인들은 자신의 소득 수준을 넘어선 무엇을 가지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듯 느껴진다. 그중에서도 부동산에 대한 한국인의 집착은 성스러울(?) 정도라 말해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아마도 한국의 근대 역사에서 부동산은 국가의 엉성한 정책과 이를 모른 척 이용한 위정자들의 악행으로 인해 돈을 벌고 종국에는 이를 통해 신분상승을 가능케 했던 효과적인 투자수단이었기에 이런 모습이 나타난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 다른 나라에서는 이런 모습을 찾기 어렵다. 그들 대부분에게도 분명 신분제가 존재했으나 이들에게 부동산이라는 것이 부를 창출하는 수단이거나 더 나아가 이것으로 인해 달라진 위상을 느낄만한 투자처가 되지 않았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볼 뿐이다. 어쩌면 상기의 이유로 그들은 부동산에의 소유욕이 한국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하며 자신의 필요에 따라 "빌려 쓰는 것"에 익숙하다 정도로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얼마 전 쓴 글에서 본인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책이라는 공공재에 아무렇지 않게 밑줄을 긋는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얘기했다. 독서가 취미가 아닌 숙제로 자리하는 본인에게 독서를 취미로 더구나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오락의 용도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서 발견한 온갖 오염들, 게다가 베스트셀러로 여러 사람을 거쳐 본인의 손에 들어온 책들에서 발견된 중증의 오염은 그 교양 있는(?) 분들에의 동경이 조금이나마 사라짐은 물론, 노력하는 독서를 한다는 열등감에 휩싸인 본인에게 일말의 안도감 내지는 희망(??) 같은 것을 안겨주었다. 기실 책뿐만이 아니다. 누군가와 공유하는 재화는 대부분 그러했다. 담배냄새가 가득한 공유자동차 쏘카, 어린아이와 유모차 사이로 운행하다가 길거리에 한가운데 내동댕이 쳐지는 공유 스쿠터들을 보며 과연 이런 사업들이 우리나라에, 우리들에게 어울리는 서비스인가 의심을 하게 한다.


본인은 스타트 업에서 일하는 동시에 코워킹 스페이스를 운영하고 있다. 2년이 지나는 시간 동안 이곳을 거쳐 지나간 입주자분들을 보며 한 가지 확신 아닌 확신(?!)을 가진 것이 있다면, 소위 공유경제의 프레임을 쓴 여러 가지 비즈니스 모델들의 불투명한 미래에 관한 것 이겠다. 근래에 우후죽순 생긴 수많은 코워킹 스페이스는 많은 사람들이 한 장소를 나누어 이용한다. 그런데 이들 중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행동을 일삼는 입주사들을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많았고 그들로 인해 벌어지는 문제들을 중간에서 조율하느라 진땀을 빼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고백한다. 당장 퇴실을 해달라 하자니 규정을 위반한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좋은 말로 돌려 얘기하자니 못 알아듣는 경우가 대다수다. (누군가가 그랬다. 설명해줘야 아는 것은 모르는 것이라고 , 부부싸움에서 본인의 배우자가 내던진 이 말의 뜻을 이해하는 게 이렇게 힘들었다) 못 알아듣는 경우는 크게 두 종류의 이유에 기인한다. 


첫 번째 말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너무 돌려 알아듣기 어렵게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겠다. 전달하기 쉽지 않은 내용을 에둘러 전달을 하는 과정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부분이 아닐까 한다(라고 쓰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다). 두 번째 두 집단 간의 상식이 완전히 다른 경우가 있었는데 대부분의 큰 문제는 이곳에서 기인했다. 공간을 내어주는 입장에서 이 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 이상의 만족감을 느끼려면 (아이러니하겠지만) 구성원 모두가 어느 정도의 불편함 역시 감래 해야 한다 생각했다. 그렇기에 모두에게 가끔은 싫은 소리도 해야 하는 것이 공간을 관리하는 본인과 우리 팀의 상식이겠다. 그런데 돈을 내고 사용하는 입장은 너무나 달랐다. 내가 돈을 냈으니 하고 싶은데로 사용한다.  자신의 행동으로 벌어진 공간을 함께 쓰는 다른 사람들이 불편한 시선 따위은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주인인 양 내 맘대로 행동한다. 누군가를 위해 양보할 마음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내가 편한 대로, 공간에 오직 혼자만 있는 것 마냥 사용한다. 내것 마냥 사용하지만 소유에 부분에 있어서는 자신의 것이 아님을 정확히 알기에 비품이나 기자재는 낭비하고 험하게 다루며 공공장소에서 뒷정리를 하는 일 역시 찾아볼 수 없다. 에어컨과 전등을 끄지 않고 귀가하고 분리수거의 의지 역시 전무하다. 그리고 이런 부분을 기분 나빠하는 다른 이들의 불편한 시선이 느껴지면 관리자에게 불만을 호소한다.    


우리는 나누는 것을 잘 못한다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본인에게 적용했던 상식적인 사회적 요구와 기준의 bottom line이 한없이 낮아진다. 한 마디로 막 쓴다. 내 것이 아니기에 아깝지 않으니 말이다. 내 것이 아니어서 책에 흔적을 남겨 내가 사용한 내역을 기록하고 내 것이 아니기에 공유 차량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내 것이 아니기에 공유 전기스쿠터를 길거리에 내팽게친다. 내 것이 아니니 말이다. 위의 뉴스 제목만 봐도 어떤 문제가 벌어질지 너무나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가. 내 것이 아니니 분명 지저분하게 이용했을 것이다. 내 것이 아니니 오랫동안 얼굴 볼 사이도 아니니 이웃들은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시끄럽게 살았을 것이다. 내 것이 아니니 내 책임도 아닌 것이니 말이다. 


본인은 우리나라 사람들과 공유라는 부분은 잘 맞지 않는다 생각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공유라는 매력적인 단어 이면에 존재하는 반대급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혼자서는 아무 문제가 없는 번듯한 개인이 공공의 무엇을 타인과 함께 나눌 때 자신의 이용 후에 같은 재화를 이용할 뒷사람들을 전혀 배려치 않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니 말이다. 어찌 보면 우리들은 우리를 감시하는 수많은 시선에는 민감하게 반응하여 기준 이상으로 좋은 모습을 보이다가도 이 감시의 손길이 없어짐을 인지하는 그때, 바로 그 순간에 평균 이하의 그것도 한참 아래의 군상으로 순식간에 변화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바로 현대 한국인의 특성이 아닐까 싶다. (예비군 훈련장에 상의를 하의에 넣고 단정히 들어가는 사람을 보는 것이 힘들고 휴대전화를 반납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그런 문화도 이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 확신한다.)


몰라서 안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유명한 영화의 제목처럼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은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 요즘 같이 선행학습을 당연시하는 이상한 풍토에서라면 어린이집에서 다 배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행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다. 남들이 보지 않으니 그저 습관이 명령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이용하고 뒷 일은 모른 척 넘긴다. 머리가 아닌 가슴이 시키는 대로 그냥 그렇게 사용한다. 만약 공유경제라는 매력적인 소비활동을 지속하고자 한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다시 한번 유치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지도 모르겠다. 친구랑은 사이좋게 지내고 단체생활에서는 서로 간의 예의가 중요하다는 단순한 진리를 다시 들어야 한다면 말이다. 그리하여 전 세계에 유행하는 이 공유경제의 흐름에 동참하고자 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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