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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마을 Jun 09. 2022

Run!

Not a game. Just a play.

제 일과는 무척 단순합니다.


아침 7시30분에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서고 오후 2시가 되면 퇴근을 합니다. 퇴근이라고 하기에 조금 애매하기는 한데, 어쨌든 사무실을 나섭니다. 그리고는 곧장 집으로 와서 차를 대놓고 아이들 학교로 걸어서 픽업을 갑니다. 2시 30분이 되면 아이들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이 때 부모가 있어야 선생님이 아이를 인계해주기 때문에 무조건 시간을 맞춰서 가야 합니다. 그렇게 아이들이 나오면 데리고 집으로 가고 3시 부터는 다시 회사 시스템에 접속해서 업무를 보기 시작합니다. 다만 미팅을 잡는건 가급적 피하는데 3시 30분에 아내가 집에 오면 그제야 아이들 케어를 완전히 넘기고 업무에 집중을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업무는 늦은 밤까지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맞벌이든 뭐든 부모가 모두 바쁜 경우, 모두가 그렇겠지만 특히 이민 가정에게 아이들 픽업과 케어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근처에 이런 공백을 메워줄 부모나 친지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모든걸 두 부부가 직접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아예 시간이 많이 비면 사람을 고용할수도 있지만 저희 가정의 경우와 같이 한시간 정도 비는 경우엔 아이를 돌봐주는 사람도 오가는 시간을 따져보면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거절하는 경우가 많아 사람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 경우엔 회사에 사정을 이야기 하고 2시에서 3시까지는 업무를 잠시 내려놓고 2시에 사무실을 나서서 아이들을 챙긴 뒤 3시부터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습니다. 한창 코로나 바이러스가 심해서 모든 직원이 fully remote 로 일을 할 때는 이런 번거로움도 없기는 했습니다만 어쨌든 다시 출근을 하기 시작한 이상 피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려는게 아니라, 제가 아이들을 픽업하고 다시 업무에 복귀해야 하는 시간까지.. 2시 30분부터 3시 사이의 이야기를 하려고 길게 서두를 늘어 놓았습니다. 정확하게는 2시 30분에서 2시 50분까지, 20분의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는 학년당 두개 학급이 있고 학급당 20명 정도의 학생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교생이라고 모여 봐야 얼마 되지 않습니다. 워낙 학생 수가 적다 보니 한두해만 지나면 서로 섞일 만큼 섞여서 이름과 집을 알고 누가 누구의 동생인지, 형인지, 언니인지 모두 압니다. 심지어 반 친구들의 엄마 아빠 등 보호자 얼굴도 모두 알고 인사할만큼 가까워지고 학군이 작은 만큼 부모들도 모두 걸어서 방문할 수 있는 거리 이내의 이웃들입니다.


그런 아이들이기에 어울려서 놀때면 반 친구들과만 노는게 아니라 서로의 형제 자매들이 모두 함께 어울려서 놀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여러 학년의 아이들이 함께 놀기에 학교가 끝난 직후 만큼 좋은 순간은 없습니다. 보통은 부모들도 일정이 있고 저처럼 일하다 말고 시간을 억지로 만들어 픽업을 온 사람들도 많아 바삐 움직여야 하지만 서로 함께 모여서 놀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잠깐 그렇게 시간을 허락해 줍니다. 하루 딱 한번, 2시 30분부터 대략 20분 정도... 아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죽어라 달리며 놀 수 있는 기회가 생깁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술래잡기 형태의 놀이를 합니다.

이 사진을 찍었던 순간의, Run! 이라는 신호와 함께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온 사방으로 흩어지던 아이들의 모습과 목소리가 눈과 귀에 선합니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는 작은 언덕이 하나 있는데 아이들은 이 언덕을 끼고 술래잡기를 합니다. 술래에게 잡히면 움직이지 못하고, 그렇게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를 다른 아이가 터치해서 움직일수 있게 해주는걸 보면 어릴때 제가 하고 놀던 얼음-땡 과 비슷한것 같은데 정확한 규칙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제가 보면서 알 수 있는건, 정말 다들 숨이 턱 끝에 닿을 정도로 달린다는 것과 암묵적인 규칙이 있는지 언덕 주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두가지입니다. 저는 그냥 걸어 올라가기만 해도 힘든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아이들은 쉴 새 없이 언덕을 뛰어 오르고 뛰어 내립니다. 술래를 피하느라 급할땐 몸을 던져 굴러 내려오기도 하더군요.


아이들의 술래잡기 경기장으로 쓰이는 언덕. 넘어져도 다칠 걱정은 없지만 잔디를 깎은 날에는 아이들이 구르면서 잘게 잘린 잔디 조각으로 온 몸을 휘감기도 합니다. 


지켜보면 누가 함께 놀 것인지, 술래는 누가 해야 하는지/몇명인지도 모호합니다. 처음엔 서너명이 시작하는데 어디선가 누구 형이 끼어들고, 누구 언니가 끼어 들면서 금방 인원수가 늘어나는데 그렇게 합류하는 아이들의 역할은 보통 자기가 하고 싶은걸 하는것 같았습니다. 어느 순간 옆으로 누가 뛰어들더니 자기가 술래라며 친구를 터치하는 경우도 쉽게 봅니다. 이렇게 터치 당한 아이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면 억울할 수도 있는데 그냥 깔깔거리면서 잠시 웃다 즐겁게 술래 역할을 하면 그뿐입니다. 간혹 터치 당한 아이가 That's not fair! 라고 주장할 때도 있는데 그러면 없던 일이 되더군요. 지켜보면 무슨 마법 같습니다. (집에서도 그렇게 합리적으로 대화해주면 안될까? Please?)




미국에 오고 나서 얼마간 저희집 아이들은 여기에 어울리는걸 힘들어 했습니다. 일단 그렇게 자기가 뛸 수 있는 한계까지 온 힘을 다해 달리며 놀아본 적이 별로 없을뿐 아니라 모호한 규칙.. 그러니까 제멋대로인 술래 숫자, 몇명이 놀고 있는지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불분명함까지... 그 명확하지 않은 상황을 불편하게 느꼈거든요. 여기에 더해 두세살 많은 형이나 누나가 나이 어린 동생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걸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신체적인 능력이 다르니 술래잡기를 같이 하는게 불공평하다고 느꼈습니다. 승패를 구분하는걸 명확하게 하고 싶어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에게 공평하도록 규칙이 정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요약하면 지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아이들의 친구들은 그런걸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재미 있으면 됐지' 라고나 할까요. 한번은 가장 나이 어린 여자 아이가 술래를 오래 했는데 터치를 못해서 더이상 재미가 없다고 하자 좀 더 나이 많은 남자 아이들이 자진해서 술래를 바꿔주는 모습도 봤습니다. 인원이 많아져서 술래가 불리하다고 하자 그럼 술래를 더 늘리자고 즉석에서 규칙을 바꾸는 모습도 봤습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 봤는데, 조금 있으면 분명 엄마 아빠가 집에 가자고 부를걸 알기에 규칙을 놓고 다툴 시간이 없기도 하고, 목적이 승패를 나누는 게임이 아니라 다 같이 즐기는 놀이이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저희 아이들도 언제 그랬냐는듯 주어진 20분을 최대한 재미있게 보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겼느냐 졌느냐를 따지는게 아니라 말이죠. 처음부터 고정 불변의 규칙을 정해 놓는게 아니라 상황에 맞춰 가장 재미있게 놀 수 있도록 즉석에서 제안을 하고, 수긍하고, 새로운 규칙으로 한번 놀아보고, 모두가 재미를 느끼는 방향을 찾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공동체의 한명으로서 정말 중요한 원칙을 아이들이 체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는 승자와 패자를 가릴 필요가 없는.. 무조건 내가 가장 큰 이득을 가져가야 하는게 아니라, 크던 작던 모두가 이득인 방향을 고민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는걸 아이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는데 생각하지도 못한 식으로 아이들은 이미 스스로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2시 50분이 가까워 오면 아이들은 한명 한명 부모들의 부름을 받아 서로 작별 인사를 합니다. 더 놀고 싶다며 떼를 쓰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기진맥진할 정도로 달리며 충분히 놀았고, 무엇보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듯 내일 또 모여서 놀거라는걸 알고 있으니까요.




하루벌어 하루를 지탱하는 삶을 살고 있는, 가정을 지켜내야 하는 사십대 어른으로써 종종 세상은 의자 빼앗기 게임이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 때문에 내가 가진것을 지키기 위해 한없이 공격적이 되고 사회적 정의가 무엇이든 세상의 규칙을 내게 유리한쪽으로 바꿔야 한다는 욕심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이는 종종 신념이라는 형태로 이웃과 충돌합니다. 내가 옳다고 믿는, 하지만 다른이에겐 옳지 않은 일이 되는 그런 충돌 말이죠.


하지만 40년 넘게 이웃과 더불어 살아온 경험을 가진 한명으로써 세상이 꼭 그런것은 아니라는 사실 역시 잘 인지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손해를 보는 것 같더라도 한걸음씩 양보함으로써 얻어지는 공동체의 이득은 결과적으로 내게도 이득이 될 수 있다는걸,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은 사회가 결과적으로 좀 더 살기 좋은 환경이 된다는 것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게임에서 이긴다는 승부욕을 내려놓고 정말 즐겁게 놀았다는 행복감을 얻었듯이 말이죠.


아이들이 여기서 더 큰 삶의 교훈을 얻어 갈까요? 모르겠습니다. 아마 지금 당장은 인지하지 못하겠지요. 하지면 무의식 속에 경험의 형태로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이 문장으로 말이죠.


Not a game. Just a p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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