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사는 이야기)

아이는 무럭무럭 자란다.

by Aner병문

정말이지 사는건 번잡스러운데 돈은 안 벌린다. 통장 보면 가끔 한숨만 나온다. 애 하나 키우는데 3억씩 든다는데, 우리 아이 세상 나고 벌써부터 한 달에 삽심만원씩 꼬박꼬박 제 분유값 벌어온다 한들 티조차 나지 아니한다. 아내는 처녀 시절부터 아토피를 꾸준히 앓아왔는데, 출산 후에는 호르몬 교란이 와서 가끔씩 피부가 가려워 고생을 더한다. 그러므로 어미와 딸이 번갈아 가며 병원을 들락거린다. 젊은 어미는 이미 몸이 아파서 가고, 아직 어린 딸은 행여나 몸이 아플까 걱정되어 할미와 어미를 앞세워 덜렁덜렁 아기띠에 매어 병원 나들이를 한다. 다행히도 잘 크고 건강하다고 하니 아직까지 위안이 된다.




듣자하니 약을 안 쓰고 아이를 키우는 것을 자랑삼는 부모도 있는 모양이지만, 우리 아내는 본디 간호사 출신으로 의학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을 오래 받았고, 어머니와 장모님은 이미 각자 남매를 둘씩 건강히 키워내셨으니 남편이자 아비자 아들이 끼어들 틈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아내가 병원을 다녀와 아이를 어르면 나는 그저 집안일이나 잘 해놓아 아내가 구태여 다른 데 신경쓰지 않게 최선을 다할 뿐이다. 특히 어제처럼 아이가 4개월을 채워 성장의 한 단락에 올라섰으며, 2차 예방접종까지 마친 뒤로는 더욱 그렇다. 아내는 병원에 다녀오면 중요한 자료가 된다며 육아수첩에 아이의 키와 몸무게, 접종한 주사와 종류와 또 앞으로 맞혀야할 주사를 꼼꼼히 적어둔다. 또 조만간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야 한다니, 정말이지 말도 떼기 전에 아이는 벌써부터 세상의 신산한 귀찮음을 다 알겠구나 싶다.



예방접종은 기본적으로 약한 균을 몸에 넣어 연습 싸움을 시키고, 그에 맞는 항체를 길러내는 과정이다.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 이전에 정약용은 이미 마진(麻疹, 홍역)에 걸린 이의 옷을 돌려가며 입는 방식으로 초보적인 예방접종을 시도했다. 비록 균의 수와 세기를 정확히 조절할 수 없어 실패로 끝났으나 정약용은 훗날 이 경험을 중심으로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저술하여 조선 의학에 기여한다. 그러므로 아이는 예방접종을 맞을 때마다 균과 밤새 싸우느라 미열이 올라서, 아내는 아이의 옷을 벗겨 살짝 쌀쌀하게 체온을 유지해주고, 밤새 칭얼거리지 않도록 돌본다. 미욱한 나는 옆에서 책이나 읽으며 잔심부름을 하는 정도다. 아내는 아이를 품에 안고 어르기도 하고, 침대에 올리기도 하고, 역류 방지 쿠션에 눕혀 달래주면서 그렇게 밤을 새웠다. 한동안 살이 폭 찐 아내의 몸은 벌써 다시 마르고 빠져 처녀 시절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몇 푼 벌지도 못하면서 일한답시고 나가 있는 내 밤잠을 걱정하여 아내는 내려와서 아이를 돌보며 선잠을 자곤 한다. 비록 용맹무비하여 호랑이도 능히 잡을 것 같던 어머니도 내 안 보는데서 나를 돌보셨을 것이고, 장모님도 같으셨을 것이며, 세상 대부분 어미가 다 그렇다.




최명희 선생의 '혼불' 에 계모와 생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이 하나 있는 홀아비에게 역시 아이 딸린 과부가 재취를 오니, 시어머니는 가뜩이나 새 며느리도 불편한데 애까지 데려와 더욱 싫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제 자식만 이뻐하고 전처가 낳은 남편 아이는 구박하리란 생각이 들었을 터이다. 아닌게 아니라 가면 갈수록 새며느리의 친자는 살이 찌고 건강한데, 전처의 자식은 마르고 병색이 완연하니 시어머니는 그러면 그렇지 앙심을 품는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새며느리는 전처의 자식에겐 좋은 옷을 입히고 맛있는 음식만 골라주며 판판이 놀게 하는데 비해, 오히려 제 자식은 헌 옷을 입히고 거친 밥만 주며 하루종일 일이 시키는 것이 아닌가. 이에 시어머니는 혹시 밤에 몰래 괴롭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방 창호지를 뚫고 살펴보기로 한다. 제아무리 낮에는 보란듯이 잘해준들 밤잠 못들도록 꼬집고 구박하면 무엇을 먹은들 살로 가랴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웬걸, 밤에도 계모는 오히려 제 자식은 멀리 추운 문가에 밀어두고 전처의 자식을 품에 꼭 안고 잔다.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시어머니는 믿기지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저렇게 새며느리가 전처의 자식을 낮밤으로 위하는데 어찌하여 저토록 보기 안좋을까 의심이 더해간다. 시어머니가 고민에 휩싸인 사이, 밤은 깊어가고 배다른 세 모자는 어쨌든 그렇게 잠들어 있는데, 세상에나, 새며느리의 몸에서 한 줄기 빛이 솟구치더니 잠든 제 자식을 포근히 감싸더란다. 제아무리 낮밤으로 못살게 굴고 괴롭힌들, 누구도 끊을 수 없는 천륜의 기운이 늘 자식을 돌본다는 사실을 본 시어머니는, 그제서야 비로소 납득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 알듯이 아비 부(父 ) 는 연장과 회초리를 들고 자녀를 건사하는 모습이요, 어미 모(母 )는

가슴과 배꼽 새로 아이를 뉘어 안은 모양새를 본땄다. 어미는 영민하고 민활하여 아비와 남편을 대신하여 벌어먹을 수 있을지 몰라도, 아비는 타고난 몸새가 그러하므로 제 젖을 아이에게 먹일 수 없다. 그러므로 눈먼 차가 아이를 덮칠 때, 아비가 어어어어 하고 놀라는 새 어미는 이미 몸을 던진다 하고, 아이의 머리 위로 뜨거운 냄비가 엎어질 때 손으로 쥐어 막으면서 '얘야, 너는 괜찮으냐.' 묻는 어미의 이야기 역시 수도 없다. 혈육 간의 끊을 수 없는 거리와 온기를 뜻한 친(親)은 말 그대로 나무(木) 위에 올라서(立) 그 사람을 살피고자(見 )하는 마음이고, 양(養) 은 아직 손가락을 빠는 아이 (良 ) 를 무릎 새에 넣고 어르는 부모의 모습을 그렸다. 그러므로 맹자께서는 사람의 본성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마땅히 글자로 미덕을 새겨 늘 보고 배워야 한다고 하셨고, 반면에 순자는 사람의 본성이란 늘 넘치고 그릇되기 쉬우니, 오히려 변치 않는 미덕을 글자에 넣어 언제나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글자 몇 가지도 이토록 천륜을 말하는데, 아직도 짐승만도 못한 아비어미가 세상에 많아 이토록 사람 속을 끓게 한다. 하여 몇 자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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