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 나이와 반비례하는, 그리고 이제 정말 좀 줄여야 할.
그러므로 돌아가신 외수 선생님 소설 속 한 늙은 시인은 말하였다. '이 몸이 비록 늙었으나 아직은 시인이라, 몸을 생각하며 술을 마시진 않는다네.' 이영도 선생의 피를 마시는 새에서, 나가 구출대의 일원 중 하나인 도깨비 비형 스라블은 술이 무엇이냐 묻는, 뱀을 닮은 종족 나가 소년 륜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쾌활하게 답한다. '차가운 불입니다. 거기에 달을 담아 마시지요.' 어쩐지 소설 속 이야기만 주워섬기는 듯 하여 더하자면, 연암 박지원 선생께서는 늘상 술이 고프시어 손님을 모시고 오면 술 석 잔 예의로 내준다는 사모님의 말씀에, 늘상 소크라테스마냥 저잣거리에 나가 아무나 손님이랍시고 붙잡아 집에 우겨넣은 뒤 지저분한 잔에 나온 술을 모두 훌쩍훌쩍 잘도 마셨다고 하시고, 저 손순효나 정철처럼, 얇은 잔을 두드려 넓게 펴서 고주망태 되도록 마셨다는 이야기도 이미 했다. 시선 이백 역시 젊었을 때는 검법과 술에 깊이 빠졌는데, 훗날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는 시를 지으라 황명이 떨어졌을때, 이미 깊이 취하여 내로라 하는 황궁의 실력자 환관 고력사에게 친히 신발을 벗기고 먹을 갈게 하는 등 그 오만방자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나온 글만큼은 역시 천하일품이었다고 한다. 결련택견의 명인, 무형문화재 송덕기 옹께서는 술 없이는 운동할 수 없다, 단언하셨다 하며, 태권도의 창시자이신 최홍희 장군께서도 술과 냉면 먹기에서는 따를 자가 없으셨다고 하니, 과연 술과 무공이란 떼어놓을 수가 없..읍읍
너무 변명이 길었지만, 하여간 술을 마다하지는 않는다. 웬만하여 공술이라면 명분 찾아 헤매이는 편이다. 대학 가서 술을 배웠으니 아주 늦지도 이르지도 않건만, 마시다보니 어쩐지 몸에 붙는 듯한 기분이었다. 인사동에서 일할 때 특히 거의 매일 술을 마셨으니, 아마 거기서 인이 박힌 듯도 싶다. 최근에 털보 큰형님이 다시금 업장에서 일하게 되었다며 몇몇 지인들에게만 초대장을 보내왔다. 저 멀리 창신동까지 가야만 보이는, 복잡한 전통시장 새에 그럴듯하게 지어진 한옥이었다. 밥 잘하는 유진이는 제 업장이 너무 바빠 갈 수 없어 바닥을 쳤다. 형님의 솜씨는 여전히 천하일품이었고, 나오는 술마다 안주마다 서로 구색이 잘 맞아 이른바 마리아주였다. 각자의 자리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쌓은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고, 나처럼 촌스럽게 책과 태권도를 벗삼아 사는 이는 역시 드문가보았다. 형님이 모처럼 애써서 만들어준 음식보다는 저 사는 이야기나 이른바 세상 '트렌드' 를 말하기에 정신이 없어서 나는 낯설었다. 나는 형님과 그냥 술과 음식 얘길 오래 했다. 형님은 도수를 높여가며 종류별로 막걸리를 내왔고, 마지막엔 내가 가져온 공부가주를 풀었다. 추석 모임 전에 햄버거 사매가 고맙다며 가져온 술이었다. 술은 맛을 아는 사람과 마셔야 좋았다. 형님이 즐거워해서 나도 좋았다. 나는 뭐랄까, 그냥 술과 음식을 먹는 자리에서는 술과 음식 이야기를 주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한 제 취향에 서로 맞는 '플랫폼' 을 찾아 헤매이느니 차라리 누군가를 만나 오랜 관계를 맺어보면 어떨까 생각했으나 입 밖에 내진 않았다. 그냥 아쉽고 안타까웠고, 밥 잘하는 유진이가 엄청, 되게 보고 싶었다.
너의 청첩장을 받는 날이 잡혀서, 아내는 그 날만 되면 술을 실컷 마실 것 아니냐며 다른 날에 한 잔도 못 마시게 했다. 모처럼 아이와 함께 찾아간 남극의 순대국에서, 셰프님과 누님이 '아이고, 그래도 한병만 줘~' 할 정도로 내가 시무룩해 잇었는데도, 아내는 강단이 있어 결사반대였다. 아이고, 안되니더, 일주일 뒤모 실컷 묵을낍니더, 절대 안되니더. 아버지 어머니는 아내가 속이 약해 내가 술 마신다 조르면 무조건 다 허락해주는 줄 아시지만 절대 그렇지 아니하다. 나는 일주일을 참았고, 일주일 중 3일은 회사 일과 도장 일이 겹쳐 하루 3~4시간씩 잤다. 가뜩이나 훈련을 마치고 곤두선 몸으로 겨우 잠들라 치면, 어린이집에 아직 익숙치 아니한 딸이 꼭 새벽 두세시 쯤에 한번씩 앵 하고 꺠므로, 나는 정말이지 온 몸이 곤두서 피곤해 있었다. 그런 몸으로, 그런 마음으로 나는 진짜 걸신들린듯이 술을 마셨다. 저번에 마시다 남긴 32도짜리 장송을 먼저 마시고, 42도짜리 마뇨주 작은 것을 마시고, 50도짜리 술로 넘어갔을 때 쯔음, 나는 두어번 화장실을 들락거렸고, 그떄서야 내 말의 앞뒤와 좌우가 전혀 맞지 않음을 알았다. 아내는 이미 걱정스러운 눈빛이었고, 너가 나중에 술 깬 나에게 말해줄때에 진상도 그런 진상이 없었다고 했다. 했던 말 또하고~ 또하고~ 아닌척하면서 나이 먹는건 진짜 싫었나봐~ 맨날 분하다고, 몸도 약해지고, 술도 약해지고, 나이 먹는거 싫다고 얼마나 그랬는지 몰라아~ 예정보다 일찍 파한 자리에서 나는 아내가 운전하는 차 옆에서 계속해서 술에 져서 너무 분하다고, 안타깝다고, 나이 먹는다고, 몸이 약해져서 태권도도 잘 못한다고, 말하고 말하고 또 말했다고 했다. 아내는 웃겨서 입술을 꾹 깨물고 운전하느라 혼이 났단다. 물론 나는 다음날 아내에게 혼이 났고, 너에게도 혼났다. 벌써 두번쨰이므로, 한번만 더 하면, 정말이지 그냥 쫓아낼 줄 알라고, 전 선생님도 이제는 술 줄이고, 적게 마시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혼이 났다. 아내는 옆에서 손뼉을 쳤다.
사람이 악한 편이 아니므로, 내가 술에 주저앉는다 해도 누군가를 때리거나, 무언가를 부수거나 하지 않을 줄은 알았으나, 그렇게 하지 않아도 취한 사람은 그 자체로 버거운 짐이라는 사실을 내가 안다. 그러므로 나는 세 번은 정말이지 아니할 결심으로, 나는 술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정말 벗들과 하고 싶은게 많아 책과 보드게임과 많은 것을 챙겼는데, 술주정만 하다가 주말 하루 반나절이 그대로 날아가버렸다. 얼마나 허망한지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정말로 결심하여, 도저히 나는 맹탕에 비싸지기만 할뿐 화학소주나, 배만 불러지는 맥주는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늘 좋은 술을 마시되, 첫 잔만 예의상 한번에 비우고, 다음 잔부터는 입술만 적셔가며 조금씩 취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정말이지 나의 태권도가 약해지는 것처럼, 술도 약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고 결코 아니 마실 수는 없으니, 내 나이에 맞게끔 마시는 법을 이제 정말 배워야 되려나 보다. 돌아가신 피천득 시인께서도 세번째로 아사코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겠다고 말씀하신느 것처럼, 나도 술로 녹아 시간을 버리는 일은 이제 두번이면 족하다. 이제 결혼하지 않은 아가씨인 너를 만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귀한 시간을 날려버린 일이 너무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