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사는 이야기)

나비 날갯짓의 하루

by Aner병문

전세계를 강타하는 역질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아니하였다. 비록 이단 종교를 비롯하여 곳곳에서 확진자가 나오긴 했으나 세계에 비하면 아직 적었다. 이딸리아는 총리가 북부 지방을 봉쇄하려 했다 국민들에게 곤욕을 치르는 중이며, 스뻬인과 더불어 사실상 고령 환자들은 치료가 어렵다 손 떼며 방역이나 추적보다는 치료에도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였다. 필리핀에서는 어젯밤을 기점으로 프랑스와 비슷하게 생존에 필요한 주요 기관을 제외하고는 모두 문을 닫는 전국적 셧 다운(shut down) 초강수를 두었는데, 덕분에 내게도 또다시 나비 날갯짓이 날아왔다. 알고보니 필리핀은 전 세계의 회사와 노동력을 투자받기 위해 임금이 비교적 저렴하며 노동법 또한 사측에 유리하게 제정되어 있어 다양한 제조업이며 서비스업, 기타 회사 등이 운집해 있는 나라였으므로 화산 폭발 사건이라든가 이번의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처럼 전세계적 규모의 혼란이 올 때 당연히 세계 경제에도 타격이 올 수밖에 없던 터였다. 제조업의 원료며 기반 등을 역시 중국과 공유하던 우리 나라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며, 게다가 필리핀 지사에 파견근무 및 출장을 갔던 우리 회사 한국 인원들은 졸지에 오고 가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미 출장길에서도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5일 이상 호텔에 격리되었던 이들이었다. 다시 돌아온다면 그들은 또다시 5일에서 14일간 격리당한 후에야 비로소 다시금 업무에 복귀 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부득이하게 대구나 경북권을 다녀와야만 하는 사람들 역시 있었으므로 회사 사람들은 갈수록 줄어들어갔다. 나는 급하게 오늘 철야 근무를 준비하였고, 덕분에 오늘 자정 무렵에는 아내의 허락을 받아 도장 사자매들과 한 잔 소소히 나눌 수 있었다. 이 것은 나비 날갯짓의 좋은 영향일 것이다.



반면 또다른 나비 날갯짓은 좋지 아니한 영향 또한 남기었다. 원래 나는 한숨 푹 잔 뒤에 간단하게 집안 청소를 해놓고, 안 그래도 숱이 없는데다 요즘 방치하여 꼭 캇빠 꼬락서니가 된 머리칼도 좀 다듬고, 도장에서 훈련하여 아드레날린을 쫙 올린 다음에 철야 근무에 임하려 했었다. 그러나 나비 날갯짓 덕분에 아내가 많이 힘들어져서, 나는 잠시 아내를 보러 다녀왔다. 아내의 매끄러워진 볼에 눈물기가 짭짤하게 남아 있어 안타까웠다. 사실 상황상 누구도 잘못한 일은 아니었으나, 나는 이번 일을 겪으며 처음으로 아내가 키만 클 뿐, 좀처럼 타인과의 충돌에 면역이 없는 이임을 또 한번 깨달았다. 화목한 가정이 없으면 학문과 무공이 다 무슨 소용이랴. 나는 아내를 보듬고 단 케잌을 사주었고, 아내와 함께 저녁 공원을 걸었다. 아내는 약간이나마 기운을 차리고 돌아갔다. 아내는 처음 있는 일에 적잖이 놀란 듯이 보였으나 잘 추스리라 마음을 다잡았다. 저녁 즈음에 아내는 회한이 서린 짧은 편지 몇 줄을 받게 되었는데, 그 편지가 아내의 마음을 조금 더 어루만져주었기를 바랄 뿐이었다. 남편으로서 중재하는 일은 참으로 쉽지 아니하다. 갈 길이 멀다. 그래도 아내가 무던하여 많이 이해하려 애써주셔서 바랄 것이 없었다. 어서 이 밤이 끝나고 돌아가고 싶다. 열흘 중 닷새 남은 출산 휴가를 신청해두었다. 곧 나의 아내와 내 딸이, 집으로 돌아온다. 밥 잘하는 유진이는 예전 함께 일했을 무렵처럼, 언니 힘들게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었다. :p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훈련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