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을 통한 변화, 그리고 자유 ㅡ 싸르뜨르를 중심으로
일본을 넘어 세계 최강을 자부했던, 극진가라테는 무에타이를 만나 큰 충격에 빠졌다. 이후 일본과 유럽에서 발전된 킥복싱은 무에타이를 넘어서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여 마침내 차별화된 격투 스포츠로 정착했다. 역으로 무에타이 역시 권투와의 만남으로 더 다양하고 세련된 주먹 기술을 쓰게 되었다. 태권도 역시 가라테에서 전래되어 지금의 독자적 위치를 갖게 되었는데, 비단 타격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라, 유도가 다시 브라질식 유술을 낳았을 뿐 아니라, 그 유술이 다시 역으로 수입되며 수많은 계기를 낳기도 한다. 요컨대 일본의 대도숙 가라테에서 아예 이름을 바꾼 쿠도空道나 국내의 공권유술 空拳術 은 도복은 입지만, 관절과 타격을 망라한 종합격투를 지향하곤 한다.
달마대사가 나뭇잎 한 장으로 장강을 건너 양나라에 불교와 인도 고유의 무공을 전파했고, 이는 중국의 오금희 五禽戲 와 결합되어 고대 상형권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무공뿐이랴. 강신주 선생은 장자 전공자답게 큰 바람을 타고 비로소 물고기에서 큰 새가 된 붕鵬 에 대해 말하는데, 결국 만남 없이 변화는 이루어질수 없는 것이었다. 칸트는 일찍이 자유를 어느 상태를 나로부터 시작하는 일이라 멋들어지게 정의했지만, 훗날 알뛰쎄는 그조차도 이미 사회가 계급에 맞는 역할을 갖다맡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우리는 모두 무대에 선 연극배우와 다르지 않다 했다.
싸르뜨르는, 지성 자체가 웅혼한 남성적 매력이라는 사실을 보여준.프랑스.사교계 최고의.철학자답게 존재와 무無, 에서 웨이터의 예를 든다. 요컨대 웨이터, 더 쉽게 말해 까페 알바는 그저 단순히 지금 이 순간 나의 역할일뿐, 그 자체가 나의 본질은 아니다. 까페 알바로서의 나는 분명 「존재」 하지만, 진짜 본질 ㅡ 싸르뜨르의.말처럼 실존하는 나는, 알바의 껍질 안에서, 실제로는 얼마든지 그만둘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얼마든지 미래를 위해 변화될수 있으니, 결국 현재의 나는 그저 가능성을 지닌 무無일 뿐이다. 또한 마땅히 현재의 속박에서 벗어나 실존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가 인간이기에, 강신주 선생은 실존보다는 탈존 脫存 이 더 옳은 번역이리라 말하기도 했다.
아내를 만나지 않았다면, 남편이자 아비로서의 나는 없다. 좋은 벗들이 없었다면, 나는 끝내 나를 지켜내지 못했을수도 있다. 좋은.은사님들이 계셔서, 허랑방탕하게 읽지 않고, 요설을 지껄이지 않을수 있었다. 존경하는 사범님을 뵈어 비로소 여러 기초를 떼고 태권도의 띠를 맨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런 인연들이 없었다면, 나는.여전히 졸렬하게 내 스스로만 지키고자 먹고 살고, 읽고.쓰며, 술 마시고 무공을 익히는 이가 되었을 것이다. 변화하려면, 지금의 나를 부정하는 자유를 얻으려면. 마땅히 긍정적인 의미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 결국 내 재주에 걸맞지 않게 잠 줄여가며 끊임없이 읽고 쓰고 움직이는 까닭도, 결국 내가 더 자유롭고 싶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