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사는 이야기)

소설가 구보씨.. 아니, 젊은 애비의 하루...

by Aner병문

내 스스로 하나 약속한 것이 있다. 아이가 손발 잘 놀리고, 말이 통할 때까지 금주하겠다는 것이 하나요, 나머지 하나는, 내 생활이 없을 정도로 힘들어도 아내에게 꼭 토요일, 일요일의 구분을 주자는 것이었다. 사람 인연 알 수 없어서 처가는 남쪽 바다와 맞닿았고, 아내는 천년 고도의 역사를 지닌 도시에서 평생을 보냈으니 갑작스러운 서울 생활이 낯설고 외로웠으리라. 아내는 성격이 활달했지만, 활동 반경이 좁고 단려한 사람이라, 집에서 조용히 있기를 즐겼고, 그러므로 몇 안되는 친구들도 대부분 경상도에서 각자 살림을 차렸으므로, 아내의 제일 친한 친구 수원댁이 그나마 가까이 산다는 점이 위안이었다. 제아무리 바깥 나들이를 즐기지 않을지라도, 때되면 맛있는 케이크도 먹으러 가고, 수영도 즐기고 해야할 젊은 나이에, 아이 돌보며 남편도 없이 집에서 혼자 애쓸 아내가 안타까워서, 적어도 주말의 구분은 꼭 주자 싶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이번 분기의 시간표는 오전 출근에 금/토를 쉴 수 있었으므로 더욱 좋았다.




전 직장의 상사이자, 미슐랭 빕 구르망에 빛나는 요리사이며, 이제는 도장 사매로서 2단을 준비 중인 밥 잘하는 유진이에게 몇 가지 레씨피를 귀뜸받아 지난 목요일 저녁부터 일단 바로 요리부터 들어갔다. 제일 가슴 아픈 일 중 하나가, 혼자 있는 아내의 식사를 돌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제아무리 어머니가 찌개를 끓여놓고, 밑반찬을 해두셔도, 혼자 있는 아내가 아이 달래기도 바쁜데 손수 상차릴 틈조차 없으리란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였다. 그나마 사둔 두유와 과일로 연명했다는 아내를 위해, 돼지고기 목살 끊어다가 오렌지 주스에 담가 풀어두고, 간장과 소주, 고추장, 꿀, 간 마늘, 대파, 참기름으로 양념장 만들어 재운 뒤, 달달 볶아 고추장 불고기에 깻잎 상추 곁들여 내놓았더니 아내가 그토록 잘 먹을 수가 없었다. 다음 날은 가볍게 국수 삶아 초고추장과 참기름에 비벼 통깨와 김 뿌려 내놓았고, 날이 갑자기 싸늘해져 집 근처 삼계탕집에서 녹두 삼계탕 사다가 발라주고, 고추장 불고기 남은 양념에 달걀 풀고 참기름 살짝 뿌려 밥 볶아 드렸다. 주말의 마지막 저녁에는, 아내가 언제든 밥을 먹을 수 있도록, 감자와 당근, 양파 깎아, 등심 잔뜩 넣어 한 솥 가득 카레를 끓이고, 남은 감자는 삶아두었으며, 아내가 좋아하는 무가당 플레인 요거트와 우유를 사다놓았고, 장모님께서 보내주신 무선 믹서로 사과, 당근, 키위 등을 갈아서 냉장고에 착착 재워놓았다. 내 스스로도 마음이 뿌듯하여 흐뭇하기 짝이 없었다.



앞서 말했듯, 쉬는 날에 조금이라도 더 여유가 있겠지 싶은 내 예견은 여지없이 깨졌다. 아이는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며, 내일은 또 다를 것이라, 전혀 예상할 수 없었고, 따라서 어제 그제 잘 잤다고 해서 오늘도 잘 자리란 보장이 없음을 지난 주말에야 알았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우는 아이를 달래느라, 차라리 주말에 이래서 정말 다행이구나 아내와 위안 삼을 수밖에 없었다. 아내가 쉬엄쉬엄 집 청소를 하는 동안, 나는 아이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은 채 안고 달래었다. 딸의 뒤통수는 부드럽고 따끈따끈해서 달콤한 연유를 바른 찐빵 같기도 했다. 딸의 볼은 보드라워서 정말이지 입술을 계속 갖다대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책 한 줄 읽지도 못하고, 찌르기 차기를 한번 제대로 못하며 오로지 어깨가 떨어져 나가도록 아이를 감싸안고 하루종일 집을 돌아다니며 아이와 함께 했다. 아이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인 이야기들 중 단 한 마디라도 아이의 마음에 잘 심겼으면 싶었다. 나는 감옥을 떠돌며 누이에게 편지를 쓴 바우 황대권 선생도, 또는 딸에게 편지를 쓴 자와할랄 네루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라는 욕심쟁이 아비였다.




아내는 늘 내가 다정해서 좋다고 했다. 경상도 토박이인 아내는, 서울 토박이긴 해도 전라도 집안에서 자라난, 수더분하며 격의없는 나를 늘 아꼈다. 아내는, 부엌과 세탁실을 분주히 드나드는 남자가 정말 낯선 모양이었다. 아내는 내가 언제나 많은 것을 양보하고, '해주고 있다' 고 생각하시지만, 사실과 아주 다르다. 돈도 많이 못 벌어오고, 운전도 서툴며, 아내가 좋아하는 아기자기한 눈썰미도 없는 나로서는, 그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할 뿐이다. 밥하고 빨래하며 청소하고 아이를 돌보는 이 모든 일들은, 그러므로 내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해야할 일일 뿐이다. 누군가가 더해주길 바라거나, 혹은 왜 반반씩 나눠하지 않느냐 라는 날선 질문은 그러므로 무의미하다. 나는 원래 어렸을때부터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자랐다. 그러므로 돌아오는 주말에는, 육회비빔밥을 하고, 부대찌개를 끓여서 아내를 또 푸짐하게 먹여야겠다. 엥겔 계수가 높아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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