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적을곳이없어서!(짧은끄적임)

아내와 통화하며.하루 넘겨 걷는 밤길

by Aner병문


교회와 육아야 그렇다 치더라도, 회사와 태권도 훈련, 도장 일, 소소한 공부가 밀렸더라도, 많지도.않은 벗들과의 약속조차 쌓였더라도, 아무리 피곤해도, 우선시되어야 한다면 아내와의 일이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내가 만약 가족 고독과 고통을 양분삼아 만세에 길이 남을 업적이나 이룬다면 모르겠다. 그러나 그럴 일도 없으려니와 나는 내 가정 행복히 평안히 꾸리기도 벅찬 사람이다.



얼마 전 결혼하고 참으로 지치고 괴롭고 외롭던 때가 있었다. 제이크 질렌홀이 하루 두 번씩 프로 권투 훈련을 받았다는 영화 사우스포에서 명코치 역을 맡은, 포레스트 휘태커는 슬픔을 삭이려고 울면서 혼자 헤비백을 친다. 나이 마흔이 넘어 내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울면서 혼자 빈.도장에서 헤비백을 치고 찰 줄 몰랐다. 그 때의 일주일은, 다시 한 번 나를 돌아볼 계기가 되었다. 일에 엮인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모두가 힘들고 슬프고 괴로워 낯설고 신기하던 일주일이었다. 삶은 맞서기처럼 승패가 극명한 승부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가능한 오래 유지되어야할 가족과의 행복한 삶에서 나는 다시 한번 체력 기르듯 버티고 여유를 지녀야 했다.



처가를 잘 다녀오고 나서는 밀린 회사일을 쳐내느라 아내가 괴로운 모양이었다. 부부가 하도 비슷해서, 여러 일을 한번에 처리하지 못하는데, 아내는 그나마 느긋하니 오히려 더 속이

탈 터였다. 아내는 늦게 퇴근했고, 이야기 좀 들어달라 했다. 처자식 먹여살리러 속세의 생업에서 별별 중생 맞닥뜨리고 이야기 듣는 척이라도 하는데 부부무촌, 제일로 가깝고 살가울 아내 이야기 못 들어서야 어찌 사내대장부인가. 때마침 부모님도 소은이도 모두 잠들어 있어 나는 퇴근 후 짐 정리하고 옷만 갈아입고 나왔다.



22도의 가을밤은 서늘하고 청량해서 차게 식힌 세작 녹차 같았다. 얼굴 아래로 닿는 달빛도 무겁지 않아 좋았다. 안양천 일렁이는, 서늘한 밤을 가로질러 나는 아내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때로는 묵은 둑 터뜨리듯 높고 거칠었고, 때로는 연달아 기술 펼치듯 빠르고 성급했으나, 나는 침착하게 잘 들으며.걸었다. 남으로 만나 결혼할 때 검은머리 파뿌리처럼 희어지도록 생사고락 함께 하자 약속했으니, 길거리 깡패건달조차 함부로 쉽게 입에 올리는 말이 의리이건만, 평생 함께할 부부는 진정 한 몸이다. 그러므로 내가 힘들때 아내가 받아주듯, 지금 아내가 힘드니 비로소 내가 받는다.



가을밤 함께 뛰며 다정한 연인들이 많아 놀랐다. 공기가 얼음물처럼.알맞게 상쾌하고 달빛 밝으니 술 한 잔 풍류도 좋지만, 마음 맞는 이 있으면 무슨 운동이든 좋을 밤이었다. 다정하게 뛰는 연인들 사이에서 몸은 혼자였을망정 사랑하는 아내의 목소리 들으며 다독여줄수 있는 사내라 모처럼 뿌듯했다. 자정이 금방 넘었다. 한시간을 넘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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