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짧은 끄적임)

ITF 번외편 ㅡ 붙이들의 세상

by Aner병문

퇴근하자마자 아내가 기저귀를 사오라 하여 왕복 한 시간 거리를 부리나케 걸어 다녀왔다. 사실 그리 오래 걸릴 길은 아니었는데 안양역 주변으로 거미줄처럼 뻗은 건널목마다 신호가 많은 탓이었다. 성품이 소박하고 준절한 아내는 채소 이름을 따서 쓰는 앱에서 종종 싼 값의 기저귀나 분유, 침대, 조립식 울타리 등의 도구를 사와달라 부탁했는데, 그때는 주로 역시 나와 같은 남편들이 머쓱한 얼굴로, 당근이시죠? 물어오면 나 역시 어색하게 아, 예 당근이죠, 서로 돈과 물건을 바꾸고는 했었다. 하여 십오분쯤 늦어 죄송한 마음이었는데 아직은 바람이 찬 저녁 8시 무렵에 기저귀 더미를 끌어안고 패딩 한 장 달랑 걸치신 알다리의 젊은 부인이 오들오들 떨고 계시길래 황급히 셈을 치르고 와보니 벌써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아이가 제법 실해져서 밤에 내놓는 소변 양이 감당이 되지 않아 아내는 더 큰 기저귀를 주문했는데 내 몸뚱이만한 기저귀 더미 네 개를 끌어안고 작달막한 내가 허둥지둥 걸어가니 다들 재미나긴 한 모양이었다. 까짓거 풍진 세상에 이 한 몸 웃음주는 소금이면 어떠랴, 물정없는 애비가 다 그렇지 하고 있는데 뒤에서 갑자기 달큰하게 술에 젖은 아가씨 목소리가 들렸다. 오오옵빠, 저 아저씨 봐, 개불쌍ㅋㅋ좀 추한듯ㅋㅋ 뒤를 슬쩍 보니 역시나 까만색 통김밥 같은 패딩을 입은 젊은 아가씨 행색은 잘 모르겠고, 불콰하게 취한듯한 덩치 큰 사내는 아직은 싸늘한 초봄 첫자락 저녁에 웬 반팔 반바지에 배는 남산만하고, 또 그 배 크기만한 안주거리를 싸안고 있었으며, 제가 무슨 수호지 첫 장의 구문룡 사진이라고 종아리를 감싼 문신이 멋들어졌다. 그도 약간 난감한 표정이긴 했으나, 아가씨는 아는지 모르는지, 오오옵빠, 우린 나중에 조로케 살지 말자?한 마디 더 했다. 취객과, 더군다나 많아야 서른도 안 되었을 아가씨와 아둥바둥 을러메기라도 할 것인가, 묵자께서도 일찍이 장강은 시냇물을 거부하지 않는다 하시지 않던가. 다만 내가 앞으로 쓰윽 한 발 다가가자 세상 무서울게 없을(또는 그렇게 보여야 할) 문신 총각 또한 과장된 표정으로 제 여자 지키겠다는 듯이 몇발짝 앞으로 나왔는데 나는 씨익 웃어주며 일부러 사투리 섞어 한 마디 했다. 아가씨, 난중에 아가씨도 애 키아보소, 말도 모대(못 해), 모단다니까, 쎄가 빠지요. 김밥 패딩 안에서 젊은 여성 특유의 기가 차다는 눈빛이 반짝 하더니 헐, 뭐래ㅋㅋㅋ 했지만 그때쯤 신호가 바뀌어 나도 길을 서둘러 건넜다. 던져놓은 말이 있으니 행여나 싶어 반몸 자세로 신경을 반쯤 뒤로 쓰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그들은 내 뒤를 따라 길을 건너지 않았다.



급하게 한 시간을 걸은 탓인가, 허벅지와 발바닥이 뻐근하여 아내가 보는 곤충 다큐멘터리를 함께 보며 주먹 기술 연습을 했다. 그 때 아내는 사마귀를 닮게 수렴진화한 사마귀붙이 에 대해 보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당랑거철이라 할만한 위압적인 갈고리 앞손이며 길쑴한 몸매가 제법 닮았으나 그 독살스런 세모꼴 얼굴이며 이목구비는 간 데 없고 동글동글한 얼굴이 귀엽기까지 한다. 길 가는 아저씨가 키가 작고 볼품없으니 아무렇지도 않게 취기에 희롱하고, 집을 망가뜨렸으니 보증금 제하겠다는 말에 칼부림을 하고, 오백원 푼돈으로 빨래 말려놓으라며 두번이나 집기를 부수는 세상이다. 사람이 아니라 사람붙이 인듯한 이들이 너무 많다. 그러므로 형가는 천하제일의 검술을 지니고도 개백정으로 살았고, 장자는 벼슬을 준다는 요청마다 진흙탕에 스스로 몸을 굴려 더럽혔으며, 사범님께서는 몇 가지 기술 안다고 쓸데없이 나서지 말고 늘 집에 조심히 들어가서 행여나 제수씨 볼 낯 없게 하지 말라 하시었다. 우리 아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씀...,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짧은 끄적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