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사는 이야기)

마침내 딸아이의 백일을 마치었다.

by Aner병문

내 딸 전소은. 그래도 명색이 아비와 어미가 모두 교회를 독실하게 다니니 꼭 그러한 뜻을 이름에 새겨주자 싶어서, '소' 자는 옥편을 다 뒤져 흙 빚을 소(塐) 돌림으로 했다. 내가 火 변 돌림이니 내 아래 항렬은 土 변 돌림이어야 했는데 정말이지 흙 토 변 한자는 마땅한게 없더라. 여하튼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어서 사람으로 나게 하신 은혜를 알아야 한다고 은혜 은 자 붙여 소은이로 했다. 소은이는 2월 28일 마지막 날 낮 12시에 세상에 났으며, 미숙아보다 겨우 100그램 더 붙어 2.7kg 로 작게 나왔는데, 의사 선생님도 아내도 '작게 낳아 크게 키우면 된다' 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실제로 아이는 그 이후로 무섭게 커서 지금은 7kg가 넘어 실팍하였다.




여하튼 난생 처음 하는 결혼에 난생 처음 출산-육아인지라 아내도 정신없겠으나 나도 늘 바빴다. 정말이지 부모는, 제 한 몸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이의 밥이자 변소이자 세숫대야였고, 옷걸이였으며, 대신 이동해주는 유모차이며,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몇 시간이고 의자와 침대도 되어야 했다. 아내와 나는 그렇게 백일을 보내었다. 그나마 초반 한달을 지내고 나니 아이의 낮밤이 구분되어 늦어도 열시면 잠들어 아침에 일어났고, 심지어 그 자는 시간은 점점 일러져서 아홉시면 영락없이 꿈나라로 빠지어 한숨 놓았다. 그동안 아내와 나는 아이의 밥과 잠을 해결하고 씻기고 집안 살림을 하느라 부푼 몸에 퀭한 눈으로 석 달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힘겹고 피곤한 나날들이었다. 그나마 회사에 다니고, 바깥 밥을 가끔 먹으며, 취미로 한두 개 가지고 있는 나조차도 오로지 아이와 함께 하는 하루가 버거워 이렇게 살다 죽는 것일까 허망할 때가 있는데, 오로지 나만 보고 서울로 올라온 아내 마음이 오죽할까. 나는 비로소 그 허망함을 깊이 알았다. 아이를 낳는 순간, 나는 없는 것이었다. 아 아이가 제 손발로 기고 서소 걷고 떠먹고 싸고 닦고 씻을 때까지, 우리는 아이의 모든 것이 되어야 했다. 나는 큰 인물이 아니라서 때때로 그 것이 버거웠다. 그래서 밤잠을 줄여가며 무공을 더듬어보기도 하고, 책 글줄이나 다시 외우곤 했다. 그때마다 아내는 별스러운 남편조차 아쉬워서 늘 내 곁에 붙어 있곤 했다. 아이가 잠이 들 때 비로소 아내는 부부로 돌아와 내 곁을 지켰다. 우리는 그렇게 늙어가며 백 일을 보내었다.




요즘에야 그럴 일이 잘 없겠으나, 백 일은 생명이 여물어 마침내 제 흔적을 하고 가겠다는 확신의 날짜였다. 나조차도 백일 전의 아이 사진을 보고 다시 아이를 보면, 어느 새 이렇게 크고 여물었는가 싶어 놀란다. 하기사 조리원에서 우리는 모두 아이를 잘 몰라서, 행여나 부서질까 무너질까 흐를까 겁을 내며 아이를 안았고, 조금만 울어도 후다닥 수유실로 가서 아이를 넘겨주곤 했다. 혹시나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을까봐서, 혹은 잘못될까봐. 아이는 그만큼 작고 여리고 흐리고 약했다. 굳지도 않은 뼈대가 휘어질까 무서웠고, 밥을 먹고 숨을 쉬는 일조차 힘겨워했다. 그러므로 옛 어른들은 백일 동안 아이가 제 몸과 마음을 잘 추슬러 하나의 인간으로 자라길 바라며 숯을 꽂아 금줄을 쳤다. 지금의 자가격리와도 비슷한, 원시적인 위생 요법이었다. 금줄을 둘러 외부인-감염 요인을 막았고, 숯으로 소독하여 가능한 아이의 주변을 깨끗하게 하고자 했으리라. 대를 이을 아들은 더욱 조심하라고 고추를 더했다. 이제 금줄과 숯, 고추는 없지만 지금도 그 마음은 전해져내려와 우리 부부는 기쁘게 백일상을 차렸다.




그리하여 나는 매주 술을 마셨다. 마침내 백일이 지나 겨우 외손녀를 보시게 된 장인장모님의 기쁨이 제일 크시었다. 그 동안 코로나가 무서워 행여나 옮길까 서울로 발걸음도 아니 하시고 매일 화상전화와 동영상만으로 그리움을 달래시던 분들이었다. 사위를 언캉 닮았데이, 하시며 장인께서는 특히 즐거워하시었다. 회사 형님 누님들과는 영등포에서 조촐히 머릿고기로 소주를 마셨다. 소주가 달아서 결국 약속한 시간보다 한 시간을 더 늦게 집에 왔다. 잘생긴 현찰 형님이 내 손에 5만원을 쥐어주며, 제수씨 속상하겠네, 이걸로 뭐 맛있는거 사다드려요~ 해서 피순대 사가서 겨우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물론 반은 장난이었다.) 그 다음주는 마침내 기다리던 너와 너의 남자친구와 곽 선생과의 자리였다. 우리는 오랫동안 보드게임을 했고, 또 그보다 더 오래 술을 마셨다. 양갈비를 굽고, 육회와 생고기를 가득 차렸고, 처가에서 보내주신 고래사 어묵으로 오뎅탕을 끓여 내놓았다. 곽 선생이 차고온 문배술과 서울의 밤으로 나는 참말 즐거웠다. 왜 이렇게 살이 쪘냐며 가는 곳마다 타박을 들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처자식이 함께 있어 좋았고, 겨우 사람 구실을 해서 신세 진 이들에게 밥 한 끼 술 한 잔 대접할 수 있어 좋았다.




너와 너의 남자친구와 곽 선생을 부를 때는 우리는 잠시 아이를 집 밖으로 내놓았다. 사실은 서울 본가에 잠시 맡겼다가 저녁 먹을 즈음 데려올 생각이었는데 웬걸, 이미 어머니는 친구분들을 모두 집에 불러오셨고, 다들 우리 손녀 볼 날만 기다리고 있다며, 짐을 바리바리 싸서는 아이를 데리고는 기어이 하루 재우셨다. 그 때 아내는 왜 그렇게 아이가 눈에 밟히던지 아버지와 어머니의 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때 차 안에서 낄낄거리며, 누가 즈 새끼 잡아갈까봐 오래도 보고 있네, 어련히 알아서 칙사 대접 안허까잉, 농을 하시자 아버지께서도 흡족하셨는지, 하늘이 그렇게 마음을 준게 어미가 되어 사는 것이여, 저런 맴도 없음 즈 새끼 어찌 이뻐하고 살겄는가, 아 , 요즘 시끄럽다고 내다버리고 말 안 듣는다고 죽이고 안 헝가, 며느리가 마음이 곱지 고와, 하셨다고 했다. 과연 아내는 모처럼 아이가 없어 자정까지 맛있는 것을 먹으며 즐겁게 놀긴 하였으나, 다음날이 되자 아내도 나도 느낄만큼 집안이 적막하여 서둘러 아이를 데려왔다. 아이가 없는 집안에서 부부끼리 오붓하게 해장밥을 먹으며, 아내는 아이고, 집이 텅 빈 거 같아가 우짜노, 우리가 지금은 젊어가 그냥저냥 살겠지만, 우리 늙어가 애 없어 보이소, 여기 절간 같을거라. 여동생이 '오빠 얘 언제 데려감?! 5시부터 깨서 계속 울고 밥도 안 먹음, 엄마도 산에 가서 아빠랑 나랑 둘이 죽어감. 빨리 데려감. 올 때 냉면.' 하고 카카오톡이 오길래, 아내와 나는 낄낄거리면서 아이를 데리러 갔다. 머리카락이 더욱 잘 나라고, 어머니는 면도칼로 동자승마냥 아이의 머리를 파르라니 밀었는데, 아이는 제 아비의 체취를 아는지 폭 안겨서 순식간에 울음을 그치고 잠들어버리었다. 동생은 냉면 그릇을 풀면서 '어쭈, 지 애비라고 아주 그렇게 울음 그치고 자는거봐봐, 어이 없어서.' 하고는 웃었고, 아버지 역시도 흡족하신 모양이었다.




아내와 연을 맺기 전, 나는 매일을 술 마시고 책 읽고 태권도 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래도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있어서 신기했다. 외로움은 늘 달라붙어 떨어질 수 없는 그림자처럼 보였다. 아내를 만나고 나서 약 1년간 주말부부를 함께 했는데, 아내가 내려가고 난 집은 적막해서, 오로지 아내가 곳곳에 남기고 난 자국만 보이는 듯했었다. 그리고 백일 동안 아이가 남긴 무게가 다시 우리 부부의 삶에 깊게 드리우고 있다. 고작해야 하루 반나절 없었을 뿐인데, 집은 적막하고 조용하였으며, 우리 부부는 말할 수 없는 허전함에 몸서리치었다. 그러므로 내 딸 전소은이 세상에 난지 백일이 넘었다. 우리 부부는 지금처럼 늘 아껴가며 귀하게 살고자 한다. 그리고 다음주는 아버지 생신으로 또 술을 마신다. 그러므로 6월 매주, 한 주를 거르지 않고 술을 마시는 셈이다. 아이 즐거워 어른 즐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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