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사는 이야기)

가끔은 처자식이 아비를 키운다.

by Aner병문

처가에 갈 때마다 참 우리 집하고는 가풍이 다르구나 못 느낀 것은 아니지만, 아내와 살 부비고 산지 벌써 햇수로 5년 가까이 되어가는데도, 아내와 내가 참 다르구나 새삼 느껴 깜짝 놀란 적이 많다. 취미부터 성격, 성향까지 사실 다른 점이 많고, 그나마 맞는다고 하면 식성과 신앙 정도다. 이 두 문제도 사실 '정도' 라고 말할 수준으로 가볍지 아니한 문제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아내나 나나 여유 있을때 서로의 부족한 점이나 다른 점을 이해 못할 성격이 아닌지라, 또한 아내가 워낙 무던하고 선한 사람이라 가끔 예민해져서 차마 큰소리는 못 내고 혼자 쫑알쫑알 잔소리 하면서 술잔이나 퍼대는 이 못난 남편을 참 잘 받아주며 산다.



아내와 내가 항상 서로에 대해 놀라는 점은, 우리 딸 소은이를 대할 때인데, 어느 날 내가 문득 생각해보니, 나는 항상 소은이에게 무엇이든 안된다, 하지 말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아내는 늘상 뭐든지 그냥 하는 일을 지켜보다가 위험할 듯한 때에야 비로소 벌떡 일어나며 안돼! 하고 제지하는 편이다. 사실 아내는 나보다 운전도 잘하고, 길도 잘 찾으며, 기계에도 훨씬 밝고, 가구 조립 등도 잘해서 그런지 매사에 나보다 대범하고 임기응변이 빠른 편인데 비해,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어째 사람이 소심해지고 얕아져서, 무엇이든 내가 할 수 잇는것만 하려고 하고, 무슨 일이든지 먼저 준비를 하거나, 내 예상 안으로 모두 경우의 수를 끌어와서 계산을 하고 있어야만 비로소 한시름을 놓는 편이다. 집안일을 예로 들자면, 아내는 하루 종일 애 보느라 바빠죽겠는데, 그까짓 밥이며 빨래, 청소, 설거지 같은거 그냥 오늘 하루 대충 해놓고 내일 또 일어나서 하지 뭐- 하고 속편하게 생각하는데 비해, 나는 무슨 일이든 오늘 쌓아놓으면 내일은 더 큰 일이 된다 하고 늘 걱정하면서, 퇴근하면 항상 밀린 빨래, 설거지, 청소 등부터 보고 그거 다 해놓은 다음에야 비로소 편-안한 얼굴로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식사 준비를 하거나 하므로, 아내는 나중에서야 참 그게 서운했었더라고 털어놓았었다. 아내의 말인즉슨, 그까잇 일 좀 나중에 하면 어떻니껴? 남편이, 애 아부지가 집에 들어오모 제일 먼저 아내도 보고, 딸 얼굴도 먼저 들여다봐야 안 옳습니꺼? 틀린 말은 아닌데, 아니 그렇다고 내가 집에 오자마자 인사도 안하고 그냥 쌩~ 하고 집안일부터 한 건 아닌데...^^;; 내 입장에서야 아내는 오로지 소은이를 건강하게 잘 돌봐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루 일을 다 한 셈이므로, 그냥 아내가 못한 일은 내가 하면 되고, 거기에 덧붙여 아내가 그냥 내 퇴근 전에 미리 카카오톡으로 한번 '오늘 이거이거 했어야 되는데 미처 못했니더~' 한 마디만 해주면, 아 그럼 내가 들어갈때 이거저거 미리 챙겨서 들어가면 되겠네잉~ 하고 나도 그림을 좀 그려서 준비를 할 텐데, 아내가 다른 영역에는 일체 내게 공유 없이 즉흥적으로 집안일을 하는 것이 몹시 견디기 어려웠다. 그냥 내가 다 하면 속편할텐데.. 라고 생각해도, 아내는 자신이 집안일을 못해서 바깥일 하는 남편한테 떠맡기는것 같아 보기 불편하며, 퇴근하고 내가 아내 대신 가사 노동을 한답시고 여기저기 들여다보고 있으면, 자기가 하루종일 뭐했는지 감시하는 것 같아 영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사실 내 입장에서는 내가 퇴근하고 빨래, 청소, 간단한 밥, 국 정도는 내가 할테니, 아내는 소은이를 돌보는 일에 주력해달라 여러 차례 부탁한 바 있지만, 아내는 그 때마다 집안일은 그대로 주부의 소관이라며 칼같이 거절해왔었다.



그런데 이러한 성향이 육아에도 고스란히 배어나는지, 아닌게 아니라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늘상 소은이에게 무언가를 하지 말라고 말한 적이 더 많았지, 아내처럼 뭘 하라고 가만히 놔둬본 적이 별로 없었다. 바로 어제에도, 떡볶이를 잘 먹고 잠시 쉬는 아내를 대신해서 고량주 반 병 마시고 기분 좋게 알딸딸해진 내가 소은이의 물놀이를 봐주려고 큰 대야에 적당히 더운 물을 붓고, 올 누드의 아름다운(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귀엽다..ㅋㅋ) 우리 딸 물장구도 치고, 장난감으로 한글 놀이도 하는 꼴을 보면서, 남자의 행복이란 이런 게지, 그 광경을 안주삼아 혼자 남은 술을 홀짝홀짝 하고 있는데, 소은이가 더운 물 꼭지를 돌리려고 하길래, 이놈 안돼! 내가 손칼로 가볍게 소은이 손목을 톡 치자, 아내는 눈살을 찡그리며 '아이고, 소은이도 그거 뜨거운거 다 아니더, 왜 자꾸 뭐든지 안된다고만 하니껴? 소은이도 뭐 자꾸 해봐야 안 늘겠어예?' 그 순간 나는 얼마 마시지도 않은 술이 화다닥 깨는듯한 부끄러움을 느꼈는데, 얼마 전 일기에도 썼듯이, 나는 소은이가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고 크면서 스스로 자립심이 생기고 제가 하고픈 일을 찾아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라 아내가 인내심을 갖고 충분히 아이가 혼자 할 수 있도록 놔두었기 때문에 저토록 적극적인 아이로 자란 것이었다. 나 역시 늘상 뭘 하면 안된다는 부모님 밑에서,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 얼마나 힘들었나? 그랬던 내가 어느새 그 시절을 잊어버리고 내 딸에게 뭐든지 이래서 안돼, 저래서 안돼, 라고 잔소리만 하며 졸졸 쫓아다녔던 기억이 새삼 부끄러웠다. 어쩐지 딸은 요즘에 내가 뭐 하지 말라고 하면 '엄마꺼!!' 라고 하며 대드는데, 뭐든지 그냥 '엄마꺼!!' 라고 하길래, 가만히 생각해보니, '엄니는 이런거 가지고 뭐라고 하지 않는데, 왜 아부지는 뭐라구 하슈!' 하는 뜻인거 같다. 근데 아내의 증언인즉, 나 없을때 아내가 또 뭐 하지 말라고 하면 소은이는 '아빠꺼!!' 하며 대든다고 한다. 어이고, 중립적인 내 딸.. 부족한 애비가 이렇게 현명한 처자식에게 배우며 삽니다. 천 권의 책보다 가정에서 더 귀한 가르침을 얻을 때도 마땅히 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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