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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May 25. 2019

촌지는 살아있다!

선물이라는 단어에 담긴 본연의 의미에 대하여.


“딩동”


단톡방의 알람이 울렸다. 스포츠센터 수영반의 단톡방이었다. 난데없이 투표가 한 건 올라와 있었다.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선생님께 현금을 모아 드리자는 제안이었다.     




1번. 1만원, 2번. 2만원, 3번. 참여의사 없음. 




돈을 모아 작은 선물을 함께 준비하자는 것도 아니고, 돈을 그대로 드린다니 사실 이 제안은 내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일흔둘의 한 수강생이 낸 아이디어라고 했다. 수영을 오래해온 그녀는 매년 수강생들이 돈을 모아서 선생님께 드리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했다. 이곳에서는 이렇게 하는 게 당연한 관습처럼 느껴졌다.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어떻게든 해야 할 것 같은 그런 아주 오래된 관습처럼.     




조금씩 돈을 걷어 작은 선물을 드리는 건 어떤지 우회적으로 이야기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금을 그대로 드리는 건 적절해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김영란 법도 통과하지 않았는가.    


 


결국 기분이 상한 일흔둘의 수강생은 올드 멤버를 주축으로 돈을 준비하겠으니 젊은 사람들은 각자 알아서하라고 이야기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불편한 심기가 가득했다. 마치 죄인이 된 것 같은 불편함을 느끼며 나는 다른 수강생들에게 물었다. 혹시 다른 곳은 어떤지, 돈을 준비하는 것이 통상적인 범위의 일인지 궁금했다.    

 



“솔직히 다른 곳도 비슷해요. 여기 다니기 전에 다른 스포츠센터를 다녔는데 그곳도 그랬거든요.”     




다른 수강생의 답변을 들으며 순간 머리가 하얘지는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나에게 촌지란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빛바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이기에.

(물론 그렇지 않은 곳이 더 많을 것이라고 믿는다.)





<선생 김봉두>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학부모에게 촌지를 노골적으로 요구하다가 문제가 붉어져 시골분교로 전임을 가게 된 한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영화를 볼 당시가 대학교 때였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아주 어릴 적-초등학교 이전에 국민학교였던 시절-하얀 봉투를 들고 학교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아주 오래된 일이지만 4~50명의 아이들이 선생님께 우르르 다가가 하얀 봉투를 내밀었던 기억이 어린 나의 기억에도 매우 어색하게 남아있다.      




어쩌면 먼지 묻은 앨범 속 빛바랜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았던 촌지라는 단어는 여전히 세월에 침식되고 풍화되지 않은 것 같다. 아직도 우리의 삶 깊숙이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 함께 숨 쉬며 살아있는지도 모른다.








촌지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이렇게 나온다. 


<촌지-정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주는 돈, 선물>      




우리는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누군가에게 정성을 드러내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특히, 5월 가정의 달에는 그 부담이 최고조 된다. 나의 경우에도 이번 달에는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결혼기념일 등이 어지럽게 얽혀 매주 무언가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다이소에 가서 카네이션을 구입하려고 보니 카네이션 상자에 아예 용돈봉투가 세트로 들어가 있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조합이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걸 본 순간 참을 수 없는 어색함을 느꼈다.      




어버이날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부분이 되었다. 어느 해는 바쁘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돈만 딸랑 송금해준 적도 있다. 돈을 송금 받은 엄마는 나에게 필요 없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그것이 우리 모녀관계에 그렇게 어색한 그림은 아니었다. 오히려 엄마에게 내가 돈 봉투가 아닌 카네이션만 내민다면 엄마는 카네이션 안에 무언가가 들어있지는 않은지, 빠져있지는 않은지, 한참을 찾을 수도 있다. 이렇듯 이 시대의 정성이라는 단어는 돈이라는 매개를 통해 서로에게 가장 안정적인 충족감을 안겨주고 있다.     




선생님에게도 그렇다. 김영란 법이 통과되고 청탁에 대한 법률이 강화되었지만 각각 기관들은 서로 다른 법의 구속을 받으며 종종 혼선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학부모는 헷갈린다. 예를 들어, 공공기관(학교, 유치원, 국공립 어린이집)에 대한 사적인 선물은 불가능 하지만, 민간 어린이집은 보건복지부에서 관리하는 보육기관으로 분류되어 해당 법의 적용 예외대상으로 분류된다. 김영란법 즉 청탁금지법 적용 대상은 초·중·고등교육법, 유아교육법, 사립학교법에 속하는 공공기관 종사자다. 그러나 어린이집은 영유아보육법을 적용받고 있어 기준이 다르다. 따라서 어린이집 교사는 법적으로 적용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린이집 원장은 정부 예산을 지원받아 누리과정을 운영하기 때문에 청탁금지법상 ‘공무를 수행하는 사인’에 포함돼 (청탁금지법) 대상이기도 하다.)     




“어린이집 선물 뭐로 준비할거야?”


얼마 전 학부모 사이에서 근심어린 대화가 이어졌다. 학부모들은 서로 간의 대화를 통해 선물에 대한 대략적인 시세를 가늠하기도 하고, 무엇을 준비해야할지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렇게 너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선에서 학부모들은 나름의 정성을 준비한다. 물론 공식적으로 선물을 받지 않겠다고 공지를 미리 하는 어린이집도 더러 있기도 다. 그러나 선물을 보내지 않는 사람도,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사람도, 모두 불편한 마음이 들기는 매한가지다.      




예전에 한 뉴스기사에서 일방적으로 받은 선물 때문에 마음이 무겁다는 선생님들에 대한 뉴스를 본적이 있다. 카톡에는 선물보내기 기능이 있는데 이 기능을 통해 학부모들이 학교 담임 선생님에게 일방적으로 선물을 보내 고민이라는 이야기였다. 카톡으로 선물을 받으면 취소하기가 불가능하기에 결국 선생님들은 그에 상응하는 값의 선물을 구매하여 다시 보낸다고 한다. 받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불편해지는 순간이 되는 것이다.     




과연 기념일이란 누구를 위한 날인 것인가.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불편한 기념일의 의미. 

이 기념일의 의미를 한 번쯤은 되새겨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정성을 전달하는 것은 중요하고도 행복한 일이다. 상대방이 보이게 될 행복감을 상상하면서 선물을 준비하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우리는 한 번쯤은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심을 다해 전해지는 것과 의무적인 부담감에 전해지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나의 진심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나는 매번 무언가를 준비하며 상대방에 대한 진심을 생각하기 보다는 그에 대한 의무감과 부담감을 더 크게 느끼고는 한다.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스승의 날에 대한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때였는데 선생님의 결혼식을 직접 기획한 적이 있다. 괴짜 중에 괴짜였던 노총각 담임 선생님은 5월의 어느 날 교내 테니스장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결정했고 당시 반장이었던 나에게 자신의 결혼식을 기획해보라는 황당한 부탁을 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어린 나에게는 사실 결혼식이라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없었다. 나는 그저 재밌게 친구들과 결혼식을 준비했고 그 과정을 즐겼다.      




이벤트 회사에 무작정 찾아가 결혼식 단상과 테니스장을 꾸밀 풍선을 주문했고, “선생님 사랑해요. 결혼 축하드려요.”라는 문구의 현수막을 제작했다. 반 친구들과 유리상자의 <신부에게>라는 곡을 축가로 파트를 나눠 연습했고, 내가 전체 지휘를 맡아 노래의 마지막에 그 현수막이 교실 창문에서 밖으로 촤르르 내려오게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롤링페이퍼에 선생님에 대한 사랑이 담긴 편지를 친구들과 함께 적어서 드렸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이 결혼식이 화제가 되어 한 방송사에서 촬영을 하기도 했었다.      




담임은 고리타분하고 무섭기도 했던 호랑이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어린 나의 기억 속에도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그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때는 선생님이 도대체 왜 우실까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이십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니 선생님이 눈물을 흘린 이유가 어렴풋이 느껴진다.      




당시 선생님이 나에게 결혼식을 준비하라고 건넨 돈은 이십 만원이었다. 아마도 그는 어린 우리들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제한된 시간동안 최선을 다했고 진심을 다해 선생님에게 마음을 전했다. 선생님은 그날 감동을 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아마도 그날 선생님이 흘린 눈물은 어린 우리들에 대한 진심어린 고마움이 아니었을까. 그날 그 결혼식은 선생님에게 이백 만원, 이천 만원,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가지 않았을까.      




이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날에 대한 기억은 가슴 한 편에 선명히 살아있다. 하루하루가 즐거웠던 기억이었다. 선생님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놀라는 얼굴은 또 얼마나 재밌을까, 수없이 상상하면서 준비했다. 그리고 이른 아침부터 결혼식장을 꾸미고 예정대로 결혼식을 진행하면서 나의 행복감은 최고조가 되었다. 나는 그날 누군가를 위해 진심을 다해 무언가를 하는 일이, 그것이 비록 값비싼 것이 아닐지라도 그 안에 진심만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그것이 선물이라는 단어가 지닌,

본연의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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