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가는 분홍 책장

이사 이야기 (1)

by 안개향

8년 동안 살던 집에서 책장은 꼭 두 종류였다. 신혼 살림으로 산, 키가 같은 베이지색 단정한 책장들. 그리고 몇 년에 걸쳐 재활용장에서 주워온, 키도 폭도 색도 다 다른 책장들.


제일 처음 주워온 4단 책장은 거실에 놓여 문구류와 미술 도구를 가득 품었다. 짙은 나무색의 4단 책장과 폭넓은 초록색 3단 책장은 시집과 그림책 관련책, 영어책들을 꽉꽉 채운 채 컴퓨터방에 자리했다. 초록색이 영 튀어서 흰색 페인트로 칠하던 날이 생각난다. 남편이 젯소를 칠하고 말리고 하얀 페인트를 칠하는 일도 어려웠지만, 붓 들고 달려드는 6살 3살 꼬마들을 말리는 게 더 어려웠다. 붓자국이 좀 남은 대로 정이 많이 가는 살림이 되었다.


제일 마지막으로 키 작은 3단 책장을 주워 왔다. 꽃분홍색에 하얀 별 무늬. 누군가의 방에서 아이의 보물을 간직하고 있었을 게 틀림없는 책장이었다. 연두색 벽지와 원목 가구로 채워진 아이들 방에 어울리지 못하고 튀는 색이었지만, 아이들은 분홍 책장을 무척이나 반겼다. 칸칸마다 바다에서 주워온 조개껍질, 만들다 만 팔찌들, 스티커, 친구와 주고받은 쪽지, 선물받은 오르골상자, 색칠한 돌멩이, 오래된 병원놀이 장난감.......


방구석에 놓인 분홍 3단 책장


아이들 눈에는 하나하나 반짝이는 별들이었겠지. 때는 세상 모래알들도 다 별가루처럼 보이는 시절이니까.






8년 산 집에서 이사 나가기 위해 제일 먼저 할 일은 '버리기'였다. 짐이야 이삿짐 센터에서 다 포장하고 옮겨준다 하지만, 정리해두지 않으면 서랍 속 쓰레기까지도 다 새 집에 들고 가게 되니 12월 내내 정리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하루는 옷장, 하루는 책장, 하루는 책상, 하루는 화장대....... 내 짐을 버리는 데만도 100L짜리 쓰레기봉투가 가득 찼다.


버려도 버려도 버릴 게 계속 나온다는 건 신기하기도 하지. 어떤 물건은 낡고 깨졌고, 어떤 물건은 지워지지 않는 얼룩 투성이가 되었고, 또 많은 물건들은 시간이 흐르며 의미를 잃었다. 아기 낳기 전 사서 여름날마다 입던 하얀색 레이스 가디건에는 누런 얼룩이 찌들었다. 회사 다니며 돈 모아 샀던 카멜색 명품 토트백은 이제 무거워서 들 수가 없다. 한 짝 밖에 남지 않은 검은색 귀걸이나 모유 유축기, 아기 포대기 같은 건 왜 구석에 그대로 남아 있었을까.


쓸모 없다고 다 버려지는 건 아니다. 큰애가 16개월쯤부터 입던 분홍색 츄파츕스 무늬의 솜패딩은 작은 아이도 물려 입었다. 그걸 입으면 아이가 꼭 딸기 바닐라 츄파춥스나 레인보우 샤벳 아이스크림이 된 것 같았다.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아기. 이 패딩을 입을 아기가 우리집에는 이제 없지만, 버리지 못하고 옷걸이에 다시 걸었다. 아이들이 힘들 때 엄마 냄새를 찾는 것처럼, 나도 아이들 때문에 울고 싶은 날이 오면 이 작은 솜뭉치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

“이건 이제 안 쓰는 거지? 버린다?”

“할머니가 준 거라 안 돼!”

“쓰지도 않으면서~ 그럼 이건? 이건 쓰레기네!”

“그건 버려도 되는데, 이건 안 돼! 이건 내가 아직 갖고 노는 거란 말이야.”

“아휴…… 병원 놀이는 이제 버려도 되지?”

“어 그건 돼!”


버리자는 나와 못 버린다는 아이들 사이 실랑이를 하며 간신히 아이들 짐을 두 박스로 줄였다. 온갖 뽑기에 애들 손바닥만한 인형, 만들기의 흔적과 스티커, 주고받은 쪽지가 끝없이 나왔다. 싹 버리고 가고 싶었지만 뭐든 필요하대고 의미가 있다는 아이들을 무작정 이기려 들 수가 없었다. 뭐, 나도 그래서 못 버린 물건이 한 박스는 족히 넘으니까. 책까지 치면........ 할 말이 없고.


그림책 <안녕, 나의 보물들>에는 공사 때문에 뜻하지 않게 자신만의 보물을 잃어버린 소녀 틸리가 나온다. 꼭대기 방 계단 아래 비밀 장소에 보물들을 숨겨두고 몰래 보물을 꺼내어보곤 한다. 하지만 집수리를 하게 된 어느 여름, 계단 위로도 새 카펫이 깔리면서 틸리는 보물들을 한순간 잃어버리고 만다.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했는데..... 보물들을 되찾을 방법은 없다. 대신 틸리는 그 물건들이 자기만의 보물이 되었던 순간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며, 밤이 길어지기 시작한 늦여름을 견딘다.

<안녕, 나의 보물들> 제인 고드윈 글 안나 워커 그림


그림책 속 이별 앞에서 마음이 아렸지만, 정리를 해보니 물건에도 이별의 순간이 필요하다는 걸 배우게 된다. 한 때의 보물들도 시간이 오래 지나면 ‘보물이었던 물건’이 되고 만다. 기억의 무게가 무거운 나같은 사람에게, 이사와 공사는 강제로 기억을 덜어낼 유일한 방법이었다. 한때 보물이었던 물건들을 이제는 옷장 서랍과 책장에서 빼내어 마음 속 서랍과 책장 깊숙한 곳으로 옮겨야 했다.


그래서 매일 짐을 정리하며, 나는 일기장에 긴 목록을 썼다. 이 집에서 내가 가져갈 수는 없지만 서랍에 옮겨두어 가끔 꺼내보고 싶은 기억들을, 사물들을, 사랑들을.

새벽 6시 "엄마 잘 다녀와" 하고 의젓하게 병원에 보내주던 29개월의 첫째
추운 겨울 12월 오후 2시 반, 햇빛이 한강에 부서지듯 빛나던 순간
침대에 나란히 누워 그림책을 읽던 수많은 밤들
쿠키가 구워지는 동안 아일랜드 식탁에 등을 기대고 <자기만의 방>을 읽던 순간
밤마다 밀던 유모차, 숨막히게 고요하던 새벽 현관. 그대로 유모차 두고 나가고 싶던 순간도 많았지.
잠근 안방문 앞에서 울며불며 나오라고 난리를 치던 둘째의 고함 소리
아이들 다 잠든 시간 식탁 구석에서 번역 숙제를 하던 새벽 2시의 고요
포대기를 두르고 둥가둥가 노래를 불러주며 거울 앞을 서성이던 오후 낮잠 시간
아이 둘이 함께 욕조에 누워도 충분히 공간이 남던, 말랑하고 동그란 몸들
처음으로 둘째가 <엄마, 있잖아>를 낭랑하게 읽어주던 날
겨울날 족욕할 때마다 바로 옆에 와서 들이밀던 둘째의 작은 엉덩이
돌아가신 큰 이모에게 받은, 손바닥 두 개만한 갈색 미니백


나란히 피아노 치던 아이들의 뒷모습
밤마다 열리던 연극 무대


목록을 작성하는 한 달 동안, 이사갈 집에 더 이상 들고 가지 않고 버릴 책장들의 몸도 휑하게 비었다. 재활용장에서 얻어왔던 책장들은 다 버리고 갈 예정이었다. 분홍 책장의 먼지를 털어 현관 쪽으로 밀어두니, 둘째가 자두 같은 손으로 책장 옆구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엄마, 우리집 와서 잘 썼으니까 다른 집 가서 또 잘 쓰이면 좋겠다. 그치?”


우리 집에 오기 전 이 분홍색 장은 몇 번의 삶을 살았을까. 이왕이면 다른 집에 가서 한 번의 생을 더 누렸으면. 우리 아이들보다 더 어린 아이의 보물들을 몇 년 간 소중하게 품어주었으면.


하여 성탄 3일 전 책장을 쓰레기장에 내어놓으며, “필요한 분 가져가세요. 이틀 후 스티커 붙이겠습니다.”라고 쪽지를 붙였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돌아섰다. 어느 집에서 미리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다음 날 오후에 나가보니 거짓말처럼 분홍 책장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이들과 나는 서로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어느 집 어느 아이의 방에서 어떤 보물을 품게 될까. 우리는 새로운 여행을 시작한 분홍 책장에게 깊은 응원을 보냈다. 가서 사랑받으며 재미나게 살라고.


그건 새로운 집으로 이사가는 우리에게 보내는 응원이기도 했다. 더 가뿐한 마음으로 서랍을 비우고 더 단단한 마음으로 서랍을 채워가자는 상냥한 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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