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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나를 꺼내는 일

by 안개별


새벽 네 시. 창밖은 아직 어둠에 잠겨 있고 숨소리조차 멎은 듯 고요하다. 잠든 아이들의 숨결은 가늘고 규칙적이다. 쌔근쌔근, 그 호흡이 고요한 시간의 온기를 지켜주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평온한 밤이겠지만 나에겐, 하루 중 ‘나’를 꺼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어내고 가만히 발끝을 바닥에 붙인다. 차가운 온기가 발바닥을 타고 올라온다. 그 감각이 이따금 반갑게 느껴진다.


화장실을 다녀온 후 조용히 부엌으로 향한다. 정수기 옆에 놓인 컵 두 개. 아이들이 자기 직전 사용한 스텐 컵 중 하나를 정수기에 올린다. 온수 버튼을 누르자 물이 팔팔 끓는 소리가 들려온다. 낮에는 소음처럼 들려오지만 고요한 밤에는 위로처럼 다가오는 신기한 현상. 잠시 뒤 또르르 떨어지는 온수와 소리 없이 퍼져가는 김. 따뜻한 물을 채우는 그 몇 초의 기다림 속에서 천천히 나로 돌아온다.



따뜻한 물 한 모금. 70도의 온수를 입에 머금으면 몸은 여전히 무겁지만 마음 어딘가는 또렷하게 깨어난다. 컵을 들고 다시 안방으로 돌아와 중문 안쪽에 위치한 드레스룸 옆 나만의 공간으로 향한다. 노트북을 열고 브런치 스토리 창을 켠다. 글쓰기 창을 띄우면 새하얀 바탕에 커서가 깜빡인다. 커서가 깜빡일 때마다 내 안의 말들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나는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던 그 말들을, 감정들과 함께 하나씩 꺼내기 시작한다. 너무 조심스럽게 꺼내면 말이 되지 않고, 너무 급하게 꺼내면 감정이 흐트러진다. 그래서 숨을 한 번 고른 뒤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린다. 그리고 오늘 하루 쌓인 말들,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천천히 꺼내 놓는다.

글을 쓴다는 건 단순히 문장을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다. 그건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고, 감정을 정리하는 일이며, 나를 나로 인정해 주는 일이다. 누군가의 엄마로, 아내로, 딸로 내 하루가 소진되어 버린 밤. 이 시간을 갖지 않으면 나는 나를 잃는다.


“돈도 안 되는 거, 그렇게까지 하지 말고 그냥 자.”
“사람이 잠을 충분히 자야지. 잠도 못 자고 그렇게 살면 안 돼.”

남편도 엄마도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일테지. 그러나 나는 그 말들에 일일이 대꾸하지 못한다. 이해받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설명해 봤자 닿지 않을 마음이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시간이 왜 소중한지, 왜 굳이 잠을 줄여가며 말도 안 되는 고단함을 견디는지. 나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 글을 쓰는 이 시간이 없다면 나는 점점 투명해지고, 내 목소리는 안으로만 움츠러들고 결국엔 아무것도 말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그런 이유에서 나는 오늘도 쓴다. 누가 봐주지 않아도, 누가 읽어주지 않아도 괜찮다. 나의 글과 말들은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해 내는 심장 박동 같은 것이기에.


어쩌면 사치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굳이 새벽을 견디며 말 몇 줄 적어 내려가는 이 일이 누군가에겐 쓸모없는 고집처럼 보일지도. 하지만 이건 내 생존 방식이다. 조용한 새벽, 글을 통해 내 마음을 꺼내며 나는 다시 나로 돌아온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하얀 종이 위에 나를 모아본다.

글을 쓴다는 건 매일 나를 꺼내는 일이다. 사라지지 않기 위해, 누군가의 그림자처럼만 존재하지 않기 위해 나는 또다시 나를 부른다. 그리고 쓴다. 말로는 다 꺼낼 수 없었던 오늘을.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밤을. 오롯이, 나로 남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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