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반차를 사용하고 남편에게 가기로 한 날. 늦어지지 않게 더욱 서둘렀고, 덕분에 제시간에 업무를 끝낼 수 있었다. 남편이 수술했던 병원으로 검진을 가는 날이었다. 남편이 먼저 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해 진료를 보기로 했다. 그럼 난 병원으로 가서 남편을 태워 함께 저녁을 먹고, 다시 입원 병원으로 옮겨 줄 작정이었다. 출발 예정 시간을 30분 남기고 남편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대기가 오래 걸릴 것 같으니 천천히 오라고.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남편의 말대로 여유 있게 출발했고, 느긋하게 운전했다. 병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근처 카페에서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샀다. 난 고민하다 레모네이드로 정했다. 피곤함을 달래기 위한 선택이었다. 두 개의 음료를 종이 캐리어에 담아 들고는 병원 2층으로 향했다.
자동문이 열리자 남편은 활짝 웃으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남편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도착할 즈음 문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을 남편을 생각하니 마음이 찡했다. 천천히 오라고 해놓고선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우린 3일 만에 만났다. 보통은 일주일에 한 번 만난다. 주말에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으로 찾아가 한두 시간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다였다. 그러나 금주에는 주중 병원 진료가 있어 3일 만에 또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감회가 남달랐다. 나를 향해 활짝 웃어주는 남편의 얼굴이 이렇게나 반가웠던가.
남편이 있는 곳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러면서 주변을 살폈다. 남편 외에는 모든 것이 무채색으로 보였다. 병원도, 사람도, 모두가 색을 잃었다. 휴대폰만 들여다보는 무표정한 환자들의 얼굴과, 간호사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검정, 흰색, 회색으로 감지되었다. 마치 흑백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듯했다. 간혹 거칠게 내뱉는 환자들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고,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수술한 부위를 절뚝거리거나 부여잡으며 자신의 순서를 물어보러 데스크로 향하곤 했다.
남편이 진료를 보기 위해 기다렸던 시간은 이미 두 시간을 넘어섰다. 담당 선생님이 급한 수술에 들어가서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 사이 지루함을 달랠 길 없어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혼자 있는 게 적적했는데 내가 와서인지 남편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간의 이야기들을 연달아 풀어놓았다. 우리 사이는 나지막한 웃음들로 채워졌고, 그 웃음은 기다림의 지루함마저 잠시 잊게 만들었다. 시간이 얼마큼 흐르는지도 모른 채 이야기들을 꿰어가듯 이어 붙였다. 차가운 병원의 공기가 서서히 데워지고 있었다.
얼마 뒤 남편이 전화를 받으러 휠체어를 끌고 문밖 복도로 나갔다. 그 짧은 사이, 작은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줄곧 불쾌한 표정으로 내 옆자리를 지키던 여성이 가장 나이가 있어 보이는 간호사에게로 다가가 다짜고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 진짜 짜증 나네. 한 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다고요. 나보다 늦게 온 사람이 먼저 들어갔는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예약을 대체 왜 받는 건데요."
잘 듣고 곱씹어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이곳은 식당이나 네일숍이 아니었기에, 여성의 말이 꼭 옳다고 만도 할 순 없었다. 크게 다치거나 죽을 만큼 아픈 환자들을 수술하는 병원이라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오는 간호사의 대답이 영 시원치 않았는지, 여성은 더 거친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지는 욕설 섞인 항의가 병원 전체를 뒤흔들었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그들을 지켜봤다.
어쩌면 같은 공간에 있던 환자들이 병원의 사정을 알았기에 불편을 감수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기다리고 침묵하는 길을 택했을 테지. 모두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불편했지만 기꺼이 감내하며 참아내고 있던 그 긴 시간들. 반면 그녀에겐 그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간호사에게 모든 걸 쏟아내고 나서도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리로 돌아와 누군가와 큰 소리로 통화하며 지금의 상황에 대한 불합리함과 직원들의 태도에 대한 욕 섞인 험담을 내뱉었다. 2층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들릴 정도의 날 선 목소리로.
통화를 마친 남편이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잠시 뒤, 바로 옆에 있던 간호사에게 물었다. 진료까지 얼마나 더 걸리겠느냐고. 간호사는 대기자가 딱 3명 남았다고 했고, 많이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고 했다. 그녀의 말속엔 다정함과 미안함이 묻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남편은 환하게 웃으며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냐고, 그러니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숨 막힐 듯 서늘하게만 느껴지던 공기가 따스한 온기를 안고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호흡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꽉 쥐고 있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진료를 마치고 나오는 길, 남편이 말했다.
“자기, 오랜만에 장어 어때?”
난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너무 좋지!"
식사를 마치고 남편을 다시 병원에 데려다주었다. 홀로 휠체어를 밀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짧은 우리의 만남은 언제나 아쉬움으로 가득했다. 그래서였을까. 떠나는 그의 등 뒤에 내 마음이 한참이나 머물러 있었다. 그 사이, 붉은빛을 머금은 밤이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날의 기다림이 꼭 고된 시간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림은 때때로 배려가 되기도 하고, 괜찮다는 마음의 표현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뎌내느냐에 따라, 마음의 결이 달라질 수가 있다. 남편의 따뜻한 말 한마디, 다정한 미소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기다림은 그렇게 가만한 온기가 되어 마음 한편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