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이른 시간. 업무를 보던 중 팀장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인원이 부족하여 행사 지원이 필요하다고. 백화점으로 지금 당장 가줄 수 있냐고 물었다. 하필 그날, 높은 구두를 신고 있어서 고민이 좀 됐지만 팀원들이 모두 지방에 있는 상황이었기에 알겠다고 했다.
하루 종일 있어야 했기에 주변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백화점까지 걸어갔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구두 탓에 발가락도. 발목도 아파 오기 시작했다. 도착도 전부터 이러면 안 되는데... 중간중간 벽을 짚은 채 잠시 멈춰 서서 종아리를 만지작거리며, 부디 오늘만 잘 참아달라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평일이었음에도 인파가 대단했다. 유동인구가 대단히도 많은 곳이었다. 오고 가며 많은 사람들이 우리 브랜드에 관심을 갖고 체험을 하고 싶어 했다. 그런 이유에서 팝업스토어 진행을 결정했을 테지. '어? 여기 뭐 하는 데지?' 하는 무심하면서도 궁금증 가득한 표정으로 입장하는 사람들. 야속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고마웠다.
팝업 행사장을 방문한 사람들을 정신없이 응대하다 보니 어느덧 오후 4시. 밀물처럼 밀려들던 수많은 사람들은 썰물 마냥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텅 비어버린 드넓은 팝업 매장이 휑하게 느껴졌다. 가끔 한두 명씩 방문하는 고객들을 직원들이 돌아가며 응대했고, 아무도 없을 때면 잠시 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편하게 자세를 잡고 띵띵 부어 있는 종아리를 주물럭거리며 얼마 남지 않은 퇴근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학생 두 명이 쭈뼛거리며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들은 내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이거... 여기 앞에서 주웠는데요. 주인을 찾아주고 싶어요."
그들이 내 눈앞에 내민 건 신용카드 한 장. 앞장엔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매장 앞을 지나던 누군가가 실수로 떨어뜨리고 간 모양이었다.
"저쪽에서 인포메이션 데스크를 본 것.."
내 옆에 있던 누군가 인포메이션으로 가서 습득한 카드를 맡겨 놓으라고 얘기하려 했다. 이렇게 커다란 매장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이들에겐 큰 용기였을 터였다. 또다시 아이들에게 부담을 지워주고 싶지가 않았다. 미안하지만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작게 속삭였다. 내가 직접 가져다주겠다고.
"너희 몇 살이니?"
"12살이요."
"나이답지 않게 눈썰미가 참 좋구나. 바닥에 흘린 걸 주운 거야?"
"네, 이게 보였어요."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을 텐데. 주인 찾아주겠다고 가져다준 거, 정말 고마워. 집으로 돌아가면 부모님한테 가서 꼭 말씀드려. 그리고 칭찬 많이 받아. 오늘 어버이날인 거 알지? 오늘의 선행이 부모님에게 좋은 선물이 되어 줄 거거든. 너희를 분명 자랑스러워하실 거야."
나를 응시하던 두 아이들의 눈이 서로를 마주했다. 키득거리며 웃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나도 함께 미소 지었다.
내 뒤에 있던 동료들 중 한 명이 탄산수 한 병씩을 아이들에게 하나씩 건넸다. 그들이 떠난 뒤, 그 카드를 들고 인포메이션으로 향했다. 동시에 카드에 적혀 있는 고객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수차례 번호 키를 누르고 나서야 연결이 된 상담원에게 카드를 습득했다고, 이곳 인포메이션에 맡기겠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도착한 인포메이션 데스크. 상황을 설명하고 여기 놓고 가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이곳은 분실물 보관소가 아니라서요. 티켓 발권기 옆 부스가 있는데, 거기에 맡기면 됩니다. 바로 옆에 있어요."
"네? 그게 어디인지 모르겠는데... 매장을 오래 비울 수가 없어서요. 대신 가져다주시면 안 될까요?"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눈에 들어오는 부스는 없었다. 앞서 카드사 상담원과 통화하며 이미 오랜 시간을 소비해 버렸기에, 이곳에 맡기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높은 구두를 신고 오래 서 있어 그런지. 다리가 많이 아파왔다.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서요. 직접 맡겨주셔야 합니다."
거절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존재한다. 사실 거절이라는 게 상대방에게 그리 반가울 일은 아니었기에, 대부분 표현을 완곡하게 하거나 미안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거절을 표한다. 그건 상대방에 대한 작은 배려이자 나에 대한 존중이었다.
그러나 인포메이션 직원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원칙만을 주장하며 동정과 배려 없는 거절을 표했다. 결국 난 티켓 발권기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한 후에 그곳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초등학생들이 카드를 습득하여 저희 매장으로 가지고 왔어요. 저기 앞에 인포메이션 들렀더니, 여기로 가지고 가라고 하더라고요."
"네, 카드 올려주세요."
카드를 맡기고 돌아서려는 순간, 직원이 나를 다급히 불렀다.
"잠시만요! 신고서 적고 가셔야 해요."
직원은 부스 밖으로 작은 종이 한 장을 스윽 내밀었다. 분실물 습득 신고서. 습득한 장소, 시간, 연락처를 기재하도록 표가 그려져 있었다. 내가 직접 주운 것도 아니고, 굳이 내 휴대폰 번호를 알리고 싶지도 않아 안에 있는 직원분에게 다시 물었다.
"앞서 얘기했다시피 제가 직접 주운 게 아니라서요. 그리고 굳이 제 개인정보를 이곳에 적고 싶진 않은데요. 카드사로 전화했으니 카드 주인이 곧 방문할 거예요. 그냥 맡기고 갈게요."
"그걸 적지 않으면 분실물을 맡길 수 없습니다. 기재해주셔야 합니다."
'그럼 학생들을 찾아 주웠던 자리를 물어보고, 그곳에 다시 버려 놓을까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가득 차올랐다. 한 번, 두 번,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난 알겠다고 대답했다. 직원의 말대로 모든 항목들을 다 기재하고 난 후에야 카드를 맡길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카드사로 전화를 걸어 카드를 맡긴 위치를 정정했다. 고객에게 다시 전화하여 안내하겠다는 대답을 들었다.
팝업 매장으로 돌아오는 길. 좋았던 기분이 썩 나빠졌다. 아이들의 순수함과 정직함에 감동받았던 그 마음이 시커멓게 변해버렸다. 불친절은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친절함은 그들이 반드시 가져야 하는 업무적인 역량도, 기본적인 태도도 아닐 수는 있을 테니까. 그러나 작은 노력은 해 보일 수 있지 않았을까. 고객의 요청이나 부탁을 들어주고자 시간과 노력을 아주 조금 할애하는 방법 말이다. 고객으로부터 긴 상황 설명을 다 듣고 난 이후였다면 더욱이.
부정적인 감정들은 그리 오래 담아두지 못했다. 이것도 타고난 재능이라면 재능일까. 불편했고 불쾌했던 기분은 어느새 싸그리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모든 상황을 오롯이 아이들이 직접 경험했다면 어땠을까. 안내데스크 직원의 불친절로 불편함을 느꼈을 테고, 티켓 발권 부스 직원에게 그 어떤 칭찬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나와 같이 받았을지도. 선의로 했던 행동에 대한 의구심을 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곤 앞으론 같은 상황에 놓일지라도 오늘과도 같은 선택을 하지 않겠지. 그들이 번거로움과 불쾌감을 참아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건 분명 아쉬울 일이었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미처 알아보지 못한 채 어른들의 실수로 놓쳐버리는 일일 테니까.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 일을 내가 겪을 수 있었으니. 방긋하게 웃는 모습이 예뻤던 아이들이 어려움을 직면하고 좌절감을 맛보았을 상상을 하니 머리가 다 어질했다. 그날의 나는, 아이들의 순수함을 지켜낼 수 있는 어른이었다. 누군가의 선의가 결국 따뜻하게 닿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야말로, 진짜 어른의 몫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들이 품었던 따뜻한 마음이 꺾여버리지 않도록, 그 작은 용기에 흠집 하나 남지 않도록 지켜줄 수 있어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리는 여전히 무거웠고 아파왔지만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가벼웠다. 마음에 깃든 온기가 종아리의 묵직한 통증을 살포시 덮어준 게 아니었을까.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중 일부는 아주 사소하고 하찮아 보일지 모르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품을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때의 나는, 아이들이 짊어졌을지도 모를 무게를 대신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 작은 선택으로 아이들의 기억 속에 ‘세상은 참 따뜻한 곳이구나’라는 믿음으로 남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믿는다.
그런 사람이고 싶다. 누군가 선의를 보일 때, 그 마음이 끝까지 따뜻하게 닿을 수 있도록, 다시 한번 조심스레 몸을 굽히고 눈높이를 맞추고 손을 내밀 수 있는 어른으로. 그렇게, 오늘처럼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