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널 담아내기엔 그릇이 작았던 거야. 그뿐이야. 스스로를 탓하지 마."
그저 펑펑 울어버렸다. 어쩌면 그 말을 그토록 기다려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말이 바닥을 향해 끝없이 가라앉던 나를, 수면 위로 데려다 놓았다. 긴 시간 동안 삼켜왔던 말들이 그제야 터져 나왔다. 나는 말 대신 눈물로, 감춰왔던 마음을 하나둘 꺼내 놓았다.
난 그저 묵묵하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다. 회사에선 ‘착하고 성실한 신입’으로 통했다. 그랬기에 누구보다 더 책임감 있게 일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 태도는 모든 사람들의 과녁이 되기에 충분했다. 크고 작은 모든 잘못들이 사회초년생이자 막내인 내 탓으로 돌아갔다. 나의 상사들은 작은 실수에도 꼬투리를 잡아 매일 같이 꾸짖었고, 답을 찾지 못해 무언가를 물으면 짜증 섞인 한숨으로 이렇게 말했다.
"얘기했잖아. 좀 제대로 들어."
"머리가 나쁘면 노력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냐?"
매일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심정이었다. 모욕적이고 치욕적인 발언들을 서슴지 않고 시시때때로 내뱉었다. 겨우 나보다 1,2년 선배인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평론가라도 되는 양 나를 신랄하게도 평가했다. 발표가 끝나기 무섭게 부정적인 피드백들을 쏟아댔고, 평상시의 업무 태도나 말투, 행동 습관, 복장 등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토를 달았다. 외롭고 추웠던 고등학교 3년을 내가 어떻게 참아 왔는데, 겨우 이 꼴을 보자고 그 긴 시간을 견뎌왔던 걸까. 슬펐고, 억울했고, 서러웠다. 출근길, 매일 마음속으로 빌었다. 오늘도 그저 무사히 지나갈 수 있기를. 이 길을 따라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빌고 또 빌었다.
3개월쯤 지났을 무렵, 그 사람을 만났다. 다른 팀 경력직 신입이었다. 얼마 뒤, 그 사람과 같은 프로젝트 팀으로 일하게 되었다. 회의가 끝나고 잔뜩 주눅 든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을 때였다.
"어쩜 영어를 그렇게 잘해요? 발음이 얼마나 좋은지... 진짜 멋있더라고요."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밝고 긍정적이고 유쾌하게까지 한 그녀는 나의 비타민이 되어주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았고, 그녀의 태도엔 여유가 넘쳤다. 자신의 생각을 어필할 줄 알고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그런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때의 그녀가 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아마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 회사를 오래 다니진 못했다. 회사와 사람에 지쳐버렸다기 보단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고, 꿈꾸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당시 나의 팀장은 이렇게 얘기했다. 세상에 그 어떤 일도 쉽지는 않다고, 지금 힘들다고 느끼는 건 당연하다고.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헤쳐나갈 방도를 같이 궁리해 보자고. 자신이 돕겠다고 했다. 그 말에 난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눈 감고 귀를 닫았던 사람이었다. 더는 그들과 함께, 같은 공간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다. 존경할 수 있는 사람들과 존중받는 곳에서 일하고 싶어졌다.
회사를 나와 처음으로 휴식기를 가졌다. 계절이 두 번쯤 바뀌는 동안, 나는 걷고, 쓰고, 웃고, 자주 울었다. 아팠던 순간들을 꺼내어 다독였고, 꾹꾹 눌러 담았던 분노와 서러움을 풀어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나는 나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죽을 만큼 힘들었던 기억들이 어느새 단단한 뿌리가 되어 나를 떠받치고 있다는 걸.
그렇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내 안에서 떨어져 나간 조각들을 맞춰가며 스스로를 회복시켰다. 누군가의 기대에 맞추며 꾸역꾸역 살아가는 대신,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알게 되었다. 그 시간들을 지나고 나니, 나도 몰랐던 힘이 내 안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무례한 말 앞에서 스스로를 지켜내는 힘. 작은 성취에도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할 줄 아는 힘. 그리고 나처럼 상처 입은 사람에게 말없이 등을 토닥이고, 눈을 맞추며 곁에 있어주는 여유를 말이다.
이따금 나와 비슷한 길을 걷는 이들을 만난다.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웃는 사람, 작게 움츠린 어깨로 눈치를 보는 사람,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는 사람. 그들에게서 예전의 나를 마주한다. 그래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모나고 뾰족한 말이 얼마나 오래 가슴에 남는지, 또 따뜻한 한마디가 어떻게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이제 나는 누군가를 응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지나온 시간들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끝없는 어둠 속에 지쳐 쓰러진 누군가를 발견하면 내가 먼저 다가가 말을 건넨다. 충분하다고. 버티며 살아가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라고. 그러니 부디,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겨줬으면 좋겠다고.
어쩌면 그 한마디가 과거의 나처럼, 오늘을 간신히 버티고 있던 누군가에게 숨 쉴 틈이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그 말이 다시 살아갈 용기가 되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그 말 한마디가 예전의 나를, 그리고 지금의 너를 조금은 덜 외롭게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