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혼자 품으면
그저 작은 불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함께 나눈다면
더 멀리 번져나가고
더 오래 기억될 것이다.
첫째는 얼마 전부터 뮤지컬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두 번째 수업을 마친 날, 배역을 받아왔다. 원하던 역할은 경쟁자가 없어 오디션도 거치지 않고 맡게 되었다며 무척 좋아했다. 어떻게 그런 역할을 고르게 됐냐 묻자, 일주일 동안 치밀하게 전략을 짠 결과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역할은 솔로 곡도 있고, 무대의 시작과 끝에도 비중 있게 등장한다고 했다. 공연날을 기대하라며 딸아이는 설레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수업을 마치고 차에 오른 아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배역을 바꾸기로 했다는 것이다. [담임 선생님]에서 [졸병2]로. '연기를 못해서 밀려난 걸까', '그게 아니라면 노래를 잘하지 못했나' 순간 이런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이유를 물었다.
"4학년 언니가 너무 서럽게 울더라고. 그 역할이 정말 하고 싶었나 봐. 그래서 내가 바꿔줬어."
이미 확정이 된 배역을 왜 내주었을까. 그것도 처음 본 언니에게. 게다가 첫째는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가진 것은 어떻게든 지켜내고야 마는, 소유욕이 강한 편이었다. 그래서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아이가 말을 덧붙였다.
"첫날부터 나에게 다가와 먼저 말 걸어줬고, 집에서 싸 온 간식도 나눠줬어. 그렇게 같이 놀다 보니 친해졌어. 그냥 양보하고 싶었어."
순간 마음이 뭉클해졌다. 담임 선생님 역할은 스스로를 빛낼 수 있는 괜찮은 배역이었고, 본인에게 썩 잘 어울렸다. 잘 해내고 싶다며 매일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아이가 그 역할을 얼마큼 간절히 원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괜스레 마음이 아려왔다.
첫째는 고마운 사람을 위해 기꺼이 빛나는 자리를 내어주었다. 무대 위에서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기회를 쥐고도, 그 빛을 함께 나누는 길을 택한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 무게를 더 잘 알기에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엄만 있지,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 엄마 딸이 이토록 따뜻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니. 마음이 막 벅차오르는 걸."
나는 첫째를 꼭 안아주었다. 아이의 얼굴에 번진 환한 웃음이, 내 마음까지 밝혀 주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살아가며 저마다의 무대에 오른다. 어떤 무대에서는 주연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무대에서는 조연이나 단역으로 서기도 한다. 그러나 그 배역의 크기가 곧 삶의 크기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삶은 그런 것이다. 누군가는 앞에서 이끌고, 누군가는 곁에서 돕는다.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노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드러나지 않지만 묵묵히 주인공을 빛나게 만들어주는 이들도 있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는 사람들, 그들 또한 무대를 완성하는 중요한 존재다.
결국 삶의 가치는 자리가 크고 작음에 달려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매 순간을 얼마나 진심으로 살아내었는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하루를 살아냈는가이다. 그 진심이 쌓여 우리의 삶을 빚어내고, 빛을 만들어낸다. 우리를 빛나게 하는 것은 맡은 역할의 크기가 아니라, 마음이 지닌 깊이일 것이다.
과연 나는 누군가에게 내 자리를 내어준 적이 있었을까. 무엇 하나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온 시간 속에서, 양보와 배려가 어쩌면 실패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게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아이를 통해 비로소 내 삶을 비추는 거울과 마주했다. 숨김없이 드러나는 나의 진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보다 더 값진 것은 누군가에게 기꺼이 내어줄 줄 아는 용기였다. 화려함은 잠시뿐이지만, 진심은 마음속에 오래 머문다. 오늘도 나는 아이를 통해 배운다. 진정한 빛은 혼자 품는 불씨가 아니라, 함께 나누며 키워가는 마음이라는 것을.